아는 여자 (2004)

영화 2019. 4. 7. 09:48

 

 

 

 

 


아는 여자 (2004), 장진

 


 


 


어설픔. 뭐든 어설픈 사람이 있다. 뭘하든 무엇을 생각하든 어설픈 사람.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이 보통 다른 뜻을 품고 있다거나 누구를 속여먹을 수 있다고 잘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 어설픈 행동들에서 우리는 진솔함을 느낄 때가 있다. 뭐 나는 뭐든 어설픈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게 진실된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여하튼.



죽음이 코 앞에 이미 다가와있는 시한부 인생이라면, 나는 인생을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까. 죽음의 때를 아는 것은 내 삶의 시선을 얼마나 변화시킬까?



이 영화 전반에는 어설픔이 묻어나 있다. 단촐하고 단순하며 즉흥적인,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생소하고 낯선 장면들로 연출되어 있다. 화면은 시종일관 흔들리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들과 인물들의 대화는 어색하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행동들, 어수선한 카메라워크,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많은 상황들,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에게 다가가는 여주인공의 행동들까지도. 우리는 이 어설픔 속에서 진지한 시선들을 잠시 내려놓고 미소와 실소 속에서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나 처음인게 많아요. 그래서 잘 모르는게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궁금하게 쳐다보게된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걸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설픈 누군가의 행동처럼 별 다른 뜻을 숨겨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속여먹을 정도의 반전도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행동하는 우리의 어설픈 궁금증에 대하여 진솔하게 답해주는 듯 하다. 그것이 뭐 그렇게 심오한 것이냐고. 사랑이 표현하기 힘든 깊은 감정은 맞지만, 결코 그렇게 깊은 고민으로 해결하려 들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고 정교한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어설픈 장면들에 적당히 포개어 우리에게 스며들게 하였다.



나란 사람이 있었는 줄도 몰랐잖아요? 내가 누군지, 나란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내가 언제부터 얼마나 가까이에서 아저씨를 느끼고 있었는지 몰랐잖아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싫어하는지도요.


여기서 서른아홉 발자국만 가면 우리집이에요. 처음엔 예순발자국도 넘었는데, 이제 서른아홉 발자국만 가면 돼요.



사실 어설픈 모습들은 감추고 싶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 잘 보이고 싶고 다 잘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늘 어설픈 모습들을 보여주고서는 불안해 하기도 한다. 내 이런 모습들에 실망하여 멀어지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생각에. 영화는 구태여 이런 어설픈 모습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코믹하고 어설픈 그 모든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히려 당당함이 느껴질 정도로 확신에 찬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헛웃음이 나오고 병맛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밉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그 속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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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2009)

영화 2018. 12. 18. 16:47

 

 

 

 

 

 

 

 

업 (2009), 피트 닥터

 

 

 

 

 

 

이보다 멋진 영화의 프롤로그가 있을까? 아무 대사없는 5분 남짓한 영화의 오프닝은 이 영화의 모든 내용과 모든 주인공의 행동, 감정들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이 오프닝에서부터 시작된 진한 감동과 여운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청자를 무겁게 압도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들 부부의 일생이, 그리고 그렇게 쌓여간 추억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그리고 지나간 아쉬운 것들도 후회가 아닌 추억이라는 것을 이 장면들을 통해 말해준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자신의 추억에 집착한다. 이 추억을 추억인 상태로, 그대로 보존한 채, 자신의 여생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주변의 공사에도, 그리고 러셀의 끊임없는 요청에도 마음을 닫은 채 엘리와의 추억을 그리며 살아간다. 최고의 오프닝을 통해 이 노인의 고집은 오히려 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노인의 고집을 비난하기보다는 노인의 고집에 동조하게 된다.

 

 

멋진 모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젠 새로운 당신의 모험을 떠나봐요! 사랑해요, 엘리.

 

 

이러한 노인의 고집은 그의 아내 엘리의 한마디로 바뀌게 된다. 늘 자신의 아내에게 즐거움을, 새로움을, 신선함을, 여행을 선물하여주지 못 하였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있던 노인은, 엘리의 글귀 하나로 변하게 된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에 아쉬움과 슬픔은 있었겠지만, 엘리는 그 추억들 모두가 멋진 모험이었음을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에서 그의 새로운 모험을 사랑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시간을 빙빙 돌아 노인이 된 주인공에게 드디어 닿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흘려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아쉬움을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지금은 순간이야,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사람들을 더는 기억하지 않도록.

 

- '일기' 가사 中. 몽니

 

 

저마다 소중한 추억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는걸까. 추억이란 무거운 짐일까 아니면 함께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삶의 날개인걸까. 주인공은 추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추억이 도착해야할 그 곳으로 가기를 집착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추억을 놓아도, 여전히 추억은 그의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애니메이션은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그리고 누군가의 못다한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랑가들에 대한 찬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꿈과 추억은 저 머나먼 무지개 드리운 폭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차분하게 말한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해주는 이들과 함께라면 꿈과 추억은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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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2018), 밥 퍼시케티 외


 



 

 

'마일스 모랄레스'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주인공은 평범함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엘리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다시금 평범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한 소년이다. 안식은 가족이 아닌 삼촌에게 있었고, 삼촌은 마일스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해주었다. 삼촌의 이해와 사랑 밖의 세상에서 주인공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 하였고, 자신이 '다름'으로 인해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평범은 감사한 존재이다. 그 자체로도 아무에게나 눈에 띄지 않을 권리를 습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평범은 개인의 고독을 지워줄 소중한 동료들을 이따금씩 만들어준다. 너도 나도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고독을 서로의 존재로 보듬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주인공도 평범의 소중함을 알기에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며, 비범한 능력 뒤에 있을 자기희생을 감내하고 싶지 않아 한다. 어느 히어로에게나 있을 능력이라는 우연적인 축복은 그에게 있어 우발적인 저주였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자신의 마스크(영웅)를 가지고 살아간다



세계관의 중심은 다차원 평행 우주이다. 다른 차원 세상에서도 피터 파커와 같은 영웅들이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대에서 활약 중이었다. 이 영웅들은 자신의 세상이 유일하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유일성과 비범함에 대하여 고독감을 느꼈다.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의 위트있는 말들 사이에는, 그리고 그의 삶과 몸매에는 매너리즘이 있었고, 순순히 이 매너리즘을 지키고 살아가야하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영웅들이 표현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은 나혼자인줄 알았는데 너 나랑 비슷하구나


 

사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독립된 존재로 홀로 싸워나가는, 모두가 저마다의 스토리에서 행복과 상실을 지나쳐가는 작은 히어로들이다. 그리고 이 히어로들은 때로 고독과 외로움에 빠져 더욱 더 침잠해 갈 때가 있다.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매너리즘을 느끼,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의의를 홀로 쫓아가야하기에 고독과 맞닿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히어로란 이런 것만이 아니라는, 세상에 너 혼자가 아니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함께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세상의 모든 히어로들에게 위로를 준다.

 

영상은 참신하며 멋지다. 참신함이라는 것은 생소함을 수반하게 된다. 그 덕분에 영화의 영상은 감명 깊지만 어느정도 비직관적이며, 산만하기도 하다. 형식은 참신하지만, 전개와 반전은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팬시한 분위기, 멋들어지는 음악, 그리고 서로 다른 차원의 히어로들을 통해 제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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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2016)

영화 2018. 11. 19. 23:13




목소리의 형태 (2016), 야마다 나오코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어, 그래서 혼자를 자처한 가해자의 이기적인 속죄 이야기.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었던걸까. 아니면 누구의 잘잘못이었는지를 먼저 따져드는 것 자체가 이 사실관계들에 대한 몰이해인 것일까. 누구 하나 잘한 것이 없는 관계들이었지만, 이들은 어렸고 그렇기에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들은 금세 얼룩졌으며 그 마음들은 오래 갔다. 어른들은 위선으로 외면하였고, 여과 없는 순수하며 솔직한 동심들은 서로를 할퀴어갔다. 이러한 동심들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게 현실이 찾아왔고, 주인공은 이 현실로부터 도망칠 계획에 있었다.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 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

그래도 난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밝은 빛이라도 될까 봐. 어쩌면 그 모든 아픔을 내딛고서라도 짧게 빛을 내볼까봐.

이렇게라도 일어서 보려고 하면 내가 날 찾아줄까 봐


-나의 사춘기에게 中, 볼빨간 사춘기


주인공인 이시다 쇼야는 집단의 관성에 자신의 무게를 더하여 집단을 가로질러 지나쳐버린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외면한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속죄를 완벽한 타인이 됨으로써 치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인지도 몰라

-보통의 존재 中, 이석원


주인공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을 꼭꼭 닫고 살았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이 주인공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 누군가를 괴롭힌 행동에 대한 미화에 동조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주인공에 공감하고 동정하고 싶었고, 그리고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자신이 저지른 죄는 그대로 휙 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죄를 짊어지고 벌을 받을 필요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영화 中, 주인공의 독백


주인공에게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눈을 감고 한발짝 다가간 만큼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도 그에게 한발짝 가까이 갔다. 주인공은 도저히 만회할 수 없었던 관계들을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되돌려간다. 과연 나는 나에게 다가온 이들에게 주인공처럼 안심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그 원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말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하면서 살아온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민폐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나 혼자만의 이기적인 방어기제이고 자의식 과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게 나는 그렇게도 조심스럽고 스스로가 답답할만큼 어렵더라. 왠지 스스로 마지막을 택했던 니시미야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두 주인공의 감정에 굴레을 풀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영상 속의 인물들 사이에 얽힌 실타래들을 풀어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영상으로 표현해놓아 좋았다. 알기 쉽게, 그리고 공감하기 쉽게, 그리고 그렇게 뜨겁진 않게. 절묘한 화면 연출과 사운드 어레인지는 마음을 울렸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기보다도 꼭꼭 닫은 문을 조금씩 열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 깊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려주었다. 마음들이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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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2018), 브라이언 싱어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 한사람의 업적과 삶을 기리기 위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그의 삶을 평면적으로 펼쳐놓고 극적인 포맷에 맞게 각색했다는 느낌의 영화이다. 퀸이라는 위대한 밴드의 프론트맨으로서의 음악적 성과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인간 프레디 머큐리의 삶과 고민, 그리고 그 속의 감정들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나는 느꼈다.



다른 록스타 지망생들과의 다른점은?

우린 부적응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부적응자들이에요.


부모들이 이야기하는 좋은말, 좋은생각, 좋은행동? 그래서 행복하셨나요?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해



출신, 외모, 사고 등 '파로크 불사라'는 영국의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는 구시대의 옳음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였다. 가족들의 사랑은 그에게 닿지 못하였다. 그에게 세상이란 이러했고 음악과 밴드, 그리고 그의 연인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그에게 구원을 주는 듯 했다. 그는 철저히 파로크 불사라가 아닌 천재 프레디 머큐리로 살아갔다. 그리고 그의 천재적 영감과 창조능력은 그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스스로를 프레디 머큐리로 치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그는 자기자신을 잃어버린듯 변해갔다. 그리고 그의 공허와 우울은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힘들게 한다. '감정'이라는 건 도대체 미움이 개입되지 않으면 깊어질 수가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프레디와 프레디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미움은 서로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럼에도 프레디를 진심으로, 정말로 사랑했던 이들은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공허와 우울의 늪에서 이 미움의 진심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던 프레디는 자신을 좀먹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날파리'들의 호의로 도피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나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참 어렵긴하다. 나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도 풀 수가 없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무작정 달려들기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마음 속 깊이 답답함만 남기게 되는 것이 '감정'인 것 같다. 그리고 프레디는 진심으로 누군가들을 사랑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주게될 상처와 미움이 두려워 그 깊이를 피해만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쓸쓸한 겁쟁이의 자기합리화에서, 이성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프레디가 이해되었고, 그가 멋있었다.



재회. 미묘하게 닿지 못하였던, 꼭꼭 숨기며 피해왔던 마음들이 녹아내리는 순간.

-쇼코의 미소 中 '씬짜오, 씬짜오'를 읽고 나서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사실의 온전한 고증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사실 이해하게 됐다기 보다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였던 마음들이 다시 닿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깊어졌던 미움과 상처 만큼,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사랑을 깨닫게되는 장면들의 위로와 감동도 깊었다. 그리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20여분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재현함으로서 그 감동을 증폭시켰다.


뭐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고, 불편하다면 불편할 소지도 있겠지만은, 프레디라는 인물의 공허와 우울에 대해 공감해볼 수 있을 만큼 제작진과 배우는 이를 잘 표현해주었고, 위로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 감정들을 잘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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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왕 랄프 (2012)

영화 2018. 10. 20. 11:41






주먹왕 랄프 (2012), 리치 무어







디즈니의 참신함은 대게 의인화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의인화된 대상들에 관객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이들이 구현해낸 사랑스러운 세계에 있다. 영화 주먹왕 랄프에서는 실제 코드로 설계되고 출력되어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게임 케릭터들을 의인화하였고,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상상하여 표현하였다. 실제로 이들이 만약 살아있는 존재라면, 이들이 감정을 가진 존재라면 어떨까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시각화하여 보여주었다.


프로그래밍된 코드는 주어진 입력에 대해 자동적으로 출력되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폐쇠적이긴해도 그 안에서 능동성과 주체성을 지니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순수한 사명을 갖고 자신들을 찾아준 어린 고객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따분하고 반복되는 일임에도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순수한 사명을 가지고 그 일들을 감당하는 삶은 숭고한 삶인가에 대해서 확신은 없다. 사명보다는 내 생활이 더 중요했고, 연약한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생활에만 몰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직업에 대한 몰입없이는 이 일을 지속할 수 없겠다는 걱정도 나를 옭아맬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면 사명에 대한 몰입이 조금 이기적인 이유이기는 해도 숭고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는 주어진 입력에 대해 짜여진 결과를 출력해야하는 케릭터들도,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자기의 일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어떨 땐 나도 정말 좋은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

"넌 악당이지만 그렇다고 니가 진짜 나쁘다는 뜻은 아니야"



게임 속 악역들은 저마다의 고충이 있었다. 그렇게 몇 십년을 살아온 랄프도 이제는 지쳐 반복된 삶에서 떠나버린다. 인정받고 싶어서,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들이 모두 쓸모없고 부질없는 일은 아니라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랄프로 살아간다. 때때로 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내 존재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나 여기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라고 외쳐보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다 버리고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궁색해 보일까봐, 그리고 내 존재의 보잘것 없음을 도리어 확인하는 일이 될까봐, 그리고 나 혼자 엄살피우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다시 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나가는 것을 모두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주변의 소중한 이들이 이 사실을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망각은 때론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씩 스스로 상기시키며 살고 싶다. 내가 어찌됐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사실인 것도 맞겠지만, 이따금 내가 타인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에는 보잘 것 없는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일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랄프도 이제 바넬로피가 소중했다. 오직 부수기만 할 줄 알았던 랄프의 손은 희망이 되었고 그 희망으로 바넬로피의 삶은 바뀌었다. 외톨이에 에러인 바넬로피는 이제 외톨이도, 에러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혼자인 것같고 그리고 그닥 쓸모없는 에러라고 생각되는 나도, 어딘가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에 대해 이 영화는 해맑게 위로해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감사한 것 밖에 없는데 왜 자조에 파묻혀 이 감사함을 주변에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했다.


랄프가 메달을 땄기 때문에 사람들이 랄프를 사랑해주고 인정해준 것이 아니라, 랄프라는 존재 자체로 사람들은 랄프를 사랑하고 소중함을 깨닫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제작자들이 표현한 세계의 참신함이 좋았고, 그것보다도 더, 악역으로 치부받던, 그리고 외톨이로, 에러로 치부받던,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는 이들에 대한 응원에 위로받았고 감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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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놈 (2018)

영화 2018. 10. 6. 00:43







베놈 (2018), 루벤 플레





가끔 열심히 말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리고 도저히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다. 할 말이 있음은 확실함에도 무엇을 먼저 말해야할지, 아니 그전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스스로도 도저히 정리하지 못하는, 정신없는 상황이.


베놈이라는 새로운 빌런 히어로의 탄생을 그리고자 함은 누구나 이해한다. 마블의 각 히어로 오리지널 스토리의 시작은 히어로의 탄생배경임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말도 안되는 독특한 특징들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려면 그럴듯하게 꾸며낸 개연성들로 관객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개연성 부여에 힘쓰고 있다는 의도만이라도 영상에 녹여야, 허구의 히어로에 관객들은 인정하고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영상이 잘려나가서인지, 아니면 제작자들의 방만인지, 베놈의 이야기들은 급작스럽고 단순하며 부자연스럽다.


액션신에서만은 베놈이라는 빌런의 특징을 여실히 잘 보여준다. 슈트에 탑승한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동화된 것도 아닌 이중적인 결합이라는 특징은 전투신 내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신으로 그나마 베놈과 에디의 신체와 감정의 이중적 결합상태. 완전한 하나의 몸이지만 언제든 다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애매모호한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개연성을 위해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좋았겠다 라고 생각은 들지만, 영화 제작자와 배급사 사이에 어떠한 논의가 오갔는지, 현실과 타협한 제작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더 고민하여 관객들에게 신선한 설득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재료를 너무나 단순하게 사용하여 아쉽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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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2012), 요시다 다이하치





개개인의 삶이 하나의 선이라고 한다면, 이 선들이 모여 관계라는 면을 이루고, 이 면들이 모여 사회라는 공간을 이룬다. 선으로 보면 별 거 없고, 평면으로 펼쳐놓으면 아주 단순한 관계들도,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복잡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아주 작은 사회를 특정한 공간에 함축시켜놓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 생각이 더 농축되어 느껴졌다. 영화에서 표현한 학교라는 공간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느끼고 있는 인격체들의 온상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영화에서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려 노력한다. '키리시마'라는 장치는 이를 간접적으로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들이 동경해왔던 존재가 확고하며, 눈에 보이는 존재임에 안심하며 살아왔던 학생들은, '키리시마'의 부재에 동요하게 된다. 서로가 독립된 존재라고 배우고 인식하려 애써 왔겠지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존재를 서로의 존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인식하였기에 '키리시마'의 부재는 개개인들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니까 결국 될 놈은 뭐든 다 되고, 안 될 놈은 뭐든 안된다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너, 그건 니가 '될 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잔인한 말은.


있단 말이야, 그 사람들한텐. 그 사람들의 감정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기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독립된 정체성을 인식한다는 역설은 학교 내 보이지않는 수직 관계를 만들었고, 모두가 인식할 수 있는 위계를 만들었다. 이 수직관계 속에서 서로를 아래로는 아주 쉽게, 위로는 아주 어렵게 인식한다. 그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렇게 펼쳐보면 보이는 것들이 하나의 선 위에서만 위태롭게 걷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서로를 공감할 수 있을까. 이해받을 수 있을까.


나 또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지만, 나를 드러내려고도, 그렇다고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고민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냥 있는듯 없는듯,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그냥 아무 생각이나 고민없이 행하며 살았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이런 주변의 입체적 상황들을 읽어낼 섬세함이, 예민함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학창생활은, 세상은 평면적이고 간단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와 같은 학창생활에 대한 동경을, 그리고 그 이면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학창생활에 대한 아쉬움이라기 보다는, '학창생활은 저런 것일까'라는 풀지 못할 호기심 때문이리라. 



항상 말하는거지만 주제는 자기 반경 1미터 내에서. 평소에 느끼는 것들 있잖아, 고등학생으로서. 수험이나, 친구관계나, 연애라던지.



청춘이란 무엇이며, 청춘이 그토록 아름답고 돌아가고 싶고 눈부신 것이라는 지나간 세대들의 망각과 미화에 대해 영화는 정말 '청춘'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위태위태한 상태이며 예민한 상태인지 말해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잘 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온전히 자신에 대한 고민과 노력으로 채워가는 이들의 삶을 대비시키며 자기 스스로 자신의 독립된 정체성을 찾아가는 삶을, 그 청춘을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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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2018)

영화 2018. 3. 17. 22:04





리틀 포레스트 (2018), 임순례




꿈이 고파 올라갔던 도시에서 배가 고파 다시 내려온 작은 숲. 누군가는 도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인공은 돌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주인공만큼 힘들지도 않았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못난 나에게 큰 힘이, 버팀목이 되었지 열등이나 짐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내가 이기적으로 살았나 생각도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홀로 내던져진 서울 그 곳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이를 먹으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샌님인, 나에게는 그렇게도 어렵고 혹독하게 느껴졌었나보다. 부족할 것 없는 부모님의 지원 속에서도 그렇게 느껴 지긋지긋한 그 곳을 이제 떠나왔는데, 영화의 주인공은 오죽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 도시락을 씹었다 다시 뱉는, 냉장고는 무심함에 젖어있는 그런 장면을 볼 때면, 나 또한 저랬으리라 엄살 아닌 엄살과 같은 공감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내가 자신을 '만나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그를 조금 경멸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했고, 겸손을 넘어서 가혹할 정도로 자신에게 인색했다.

-「쇼코의 미소」 한지와 영주 中, 최은영


이 곳에는 그녀가 그토록 바랬던 것들은 없었지만, 그토록 잊지 못하였던 것들이 있었다. 잊지 못한 채 햇살로 남았던, 혹은 응어리로 남었던 그런 것들이 있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그녀를 감싸는 자연들. 그녀는 그 모든 것에 맞서 단단한 땅에서 양분을 받아 그 땅에 뿌리를 내린다. 하나 둘 씩 이겨나간다. 하지만 떠나온 그 곳도 자꾸만 주인공을 붙잡았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억지로 붙잡았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 둘 씩 털어버린다. 털어버린다는 표현보다는 억지로 억지로 하나 둘 힘겹게 떼어낸다는 말이 맞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인정한다.


누구에게나 돌아갈 '작은 숲'이 있을까. 나는 돌아왔지만 여긴 이제 내 숲이 아니라는 걸 느끼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딘가 My Only Home 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도대체 어디가 내 집이고 어디가 내 집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공허함 속에서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단하고 멋져보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고 아름다운 장면들 속에 꿋꿋히 살아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만의 '작은 숲'에 돌아와 뿌리내린 그 작은 나무가 부러웠다.


이 나무가 홀로 아름답게 사계절을 꿋꿋히 보내는 장면들은 어느 누구에게는 힐링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 또한 공감과 동경 속에서 주인공을 바라보았고 마음을 어느정도 치유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잔잔한 아름다움 속에서 제작자는 관객들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담아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만져준다. 누군가에겐 현실 없는 미화이고 재미없는 따분함일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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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펜서 (2018)

영화 2018. 3. 1. 22:30







블랙 펜서 (2018), 라이언 쿠글러







신성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전통과 신성을 지키며, 모순되게도 지구 최고의 과학수준을 유지하는 도시 와칸다. 신의 뜻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곳에 직격한 비브라늄 운석에 의해 이곳은 특별해졌고 특별한 만큼 특별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은 은둔과 방관을 선택하였다. 은둔 중에도 부족은 서로 싸웠고 또 싸웠다. 어떻게 보면 동족이라 불러야할 이들은 서로에게 이빨을 내보인 채로 싸우다 하나의 리더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서로 유대하였다. 


마블 유니버스 각 히어로들의 영화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적어도 느낀 점을 하나씩을 주는 이유는 제작자가 히어로를 통해 부각시키고자 하는 스토리가 혹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뒤틀린 애국심에 대하여 얼마나 비꼬고 있는지는 마블 유니버스 영화 전반에 녹아있지 않는가. 코믹스러운 히어로에게는 웃음을 심어놓고 정말로 화려하고 멋진 히어로에게는 화려함을 심어놓는다.


블랙 펜서가, 아니 티찰라가 마블 유니버스의 하나의 히어로로서 어떤 특별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제작자의 의도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감상하여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영화 전반적으로 심어져있는 무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서 영화를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블랙 펜서라는 영화와 티찰라라는 히어로에게 느껴지는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모순'이다. 영화의 모든 스토리와 와칸다의 이들, 티찰라의 행동들에는 모순이 심어져 있다. 동족 혹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동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히려 하나의 생명을 앗아갈 수 밖에 없었던 모순. 그러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증오 속에 있는 티찰라의 행동 속에서 똑같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행동들. 도대체 동족의 범위가 어디인지 알 수 가 없는, 동족 아닌 동족들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동족들을 죽이고 싸우는 와칸다의 모습들. 이 모든 장면들에 모순들이 심어져 있다고 나는 느꼈다. 자신들이 했던 모순되는 모든 행동들을 마치 일부러 망각한듯 마지막에 당당히 국제구호센터 터를 보며 웃는 왕족들의 미소는 소름끼쳤고, 마치 자신들이 이제는 정당하게 방관을 그만두고 동족들을, 어려운 이들을 구하겠다는 왕족의 선언 또한 소름끼치도록 모순되었기에 미웠다. 어려운 이들을 섬겨야 하는 이들에게서 선은 느껴지지 않고 모순적이고 독단적인 우월감만이 느껴졌다. 그저 운석이 그곳에 떨어졌을 뿐인데 말이다.


티찰라는 히어로의 모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 나라의 적법한 지도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억지를 만들고, 반대로 자신에게의 화살은 와칸다를 위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변명으로 정당화한다. 위대한 왕이 되고자 하지만 자신의 행동들에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일들에의 고집은 꺾지 않는다.


영상은 오묘하며 아름답다. 와칸다와 비브라늄의 이미지는 일관되게 관객에게 다가와서 좋았고, 그들의 전통 또한 이질감 없이 표현되어 있다. 와칸다의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게 되어 눈이 즐거웠다.


다만 불편한 영화였다. 영화는 시원시원한 액션 대신 기분나쁜 불편함들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렇게 기분나쁘게 불편한 이유는 역시, 현실도 그렇게 다르게 흐르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 때문일 것 같다. 아마 제작자의 의도가 이러한 비꼼에 있었다면 성공적인 영화였지 않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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