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2012), 요시다 다이하치





개개인의 삶이 하나의 선이라고 한다면, 이 선들이 모여 관계라는 면을 이루고, 이 면들이 모여 사회라는 공간을 이룬다. 선으로 보면 별 거 없고, 평면으로 펼쳐놓으면 아주 단순한 관계들도,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복잡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아주 작은 사회를 특정한 공간에 함축시켜놓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 생각이 더 농축되어 느껴졌다. 영화에서 표현한 학교라는 공간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느끼고 있는 인격체들의 온상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영화에서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려 노력한다. '키리시마'라는 장치는 이를 간접적으로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들이 동경해왔던 존재가 확고하며, 눈에 보이는 존재임에 안심하며 살아왔던 학생들은, '키리시마'의 부재에 동요하게 된다. 서로가 독립된 존재라고 배우고 인식하려 애써 왔겠지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존재를 서로의 존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인식하였기에 '키리시마'의 부재는 개개인들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니까 결국 될 놈은 뭐든 다 되고, 안 될 놈은 뭐든 안된다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너, 그건 니가 '될 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잔인한 말은.


있단 말이야, 그 사람들한텐. 그 사람들의 감정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기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독립된 정체성을 인식한다는 역설은 학교 내 보이지않는 수직 관계를 만들었고, 모두가 인식할 수 있는 위계를 만들었다. 이 수직관계 속에서 서로를 아래로는 아주 쉽게, 위로는 아주 어렵게 인식한다. 그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렇게 펼쳐보면 보이는 것들이 하나의 선 위에서만 위태롭게 걷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서로를 공감할 수 있을까. 이해받을 수 있을까.


나 또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지만, 나를 드러내려고도, 그렇다고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고민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냥 있는듯 없는듯,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그냥 아무 생각이나 고민없이 행하며 살았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이런 주변의 입체적 상황들을 읽어낼 섬세함이, 예민함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학창생활은, 세상은 평면적이고 간단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와 같은 학창생활에 대한 동경을, 그리고 그 이면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학창생활에 대한 아쉬움이라기 보다는, '학창생활은 저런 것일까'라는 풀지 못할 호기심 때문이리라. 



항상 말하는거지만 주제는 자기 반경 1미터 내에서. 평소에 느끼는 것들 있잖아, 고등학생으로서. 수험이나, 친구관계나, 연애라던지.



청춘이란 무엇이며, 청춘이 그토록 아름답고 돌아가고 싶고 눈부신 것이라는 지나간 세대들의 망각과 미화에 대해 영화는 정말 '청춘'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위태위태한 상태이며 예민한 상태인지 말해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잘 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온전히 자신에 대한 고민과 노력으로 채워가는 이들의 삶을 대비시키며 자기 스스로 자신의 독립된 정체성을 찾아가는 삶을, 그 청춘을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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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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