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1946),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은, 유명한 유수의 소설들은 독특한 인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우연이 포함되지 않은 필연과 논리의 세상은 그 자체로도 따분하고 독자들의 흥미 유발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악재인가 보다. 데미안, 안나 카레리나, 마담 보바리, 달과 식스펜스 등등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진다. 독특한 인물의 등장은 어떻게 보면 저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필수의 재료인 것이다. 여러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인물들의 독특한 사상과 행동들이 한데 섞여 머리 속에 남으면서 미묘한 클리셰를 만들기 마련이다. 처음 스트릭랜드를 만났을 때의 감명과 충격 그리고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다졌던 각오는 이제는 다른 인물들을 만날 때의 식상함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출생과 생애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실제로 광산 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에 갔었으며 그 곳에서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이 점이 소설의 독특한 식상함을 변호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소설은 식상했다.) 자유와 실존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조르바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소설의 서술자의 회고적인 문체와 서술자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나만 믿지. 내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나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나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다시 글의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조르바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조르바라는 인물은 그-소설의 서술자. 소설의 저자 혹은 독자로 까지 확장해도 무방할-가 정작 실천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욕망과 사상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우리는 조르바의 괴팍한 사상과 행동에 공감을 하고 몰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화자의 행동과 사상에 공감을 하면서 몰입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조르바가 될 수 없기에 조르바의 행동들에 동경을 보낸다. 진정한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방구석의 한심한 책벌레로서. 이러한 특징이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미묘하게 겹친다. 하지만 조르바는 데미안과 다르게 자신의 고상한 신념보다는 일차원적이고 마쵸적인 본능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본능과 욕망은 모든 윤리적인, 종교적인 것들을 뛰어넘어 오히려 그것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

단순히 인물들간의, 크레타 섬의 작은 마을의 차원을 넘어서 그가 목격해왔던 격동의 시기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단순한 조르바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민들의 시선과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할 수 없는 수많은 행동들을, 보통 사람이라면 고뇌하고 그 실천을 결국 기꺼이 포기해야 했을 그런 행동들을 조르바는 스스럼없이 행한다. 서로에게 강요하는, 어쩌면 인간들끼리 만들어버린 굴레에 우리가 스스로 갖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저자는 '자유'라는 단어보다는 '조르바'라는 말로 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1,2차 대전과 그리스에서의 격동 등을 겪으면서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의 답을 조르바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굴레에 의해 진짜 중요한 단순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소설은 꽤나 두껍다만 읽고 나면 두꺼운 양 만큼의 생각이나 줄거리가 머리 속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저자가 글을 멋들어지고 아름답게 쓴편도 아니거니와 소설 자체는 매우 평면적이고 어쩌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이 재밌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점은 저자의 역량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가 정말로 실화 그대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을 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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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1857)

도서 2015. 9. 1. 01:53








보바리 부인 (1857), 귀스타브 플로베르








권태와 향락 그리고 파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은 직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두 세계관의 연속성이 묘하게 두 소설을 갈라놓는다.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혁명 이후 점차 나아지는 삶의 빈곤, 이 시간적인 배경의 불연속점은 두 리얼리즘 소설들의 사상적 틀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연에 감사했다.


귀족이 아닌 평민 샤를 보바리의 자족과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프랑스 혁명 이후 굉장히 안정되고 절대적인 삶의 질이 상향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하나의 현상이다. 예전의 착취 속에선 보바리의 모친이 그의 장래를 위해 뒷바라지 하는 그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엠마 보바리의 허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녀의 허영 또한 혁명 이전 시기의 지나친 착취에 시달리던 평민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여유' 였을 것이다. 치열하게 삶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와 어느 정도 안락한 삶에서의 권태와 허영에 관한 이야기가 불과 몇 십년의 텀을 두고 개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책 'Status Anxiety'에서 말했듯이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샤를 보바리, 엠마 보바리, 그리고 용빌에 많은 주민들 같은 문학적 인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농민들이 당장 닥쳐오는 빈곤과 궁핍에 한끼한끼 걱정하며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던, 그렇기에 자크들 서로들에게는 따스했던 생탕투앙과 달리 융빌의 주민들은 가식에 숨어 서로에게 표면적으로 따스한 척하지만 사물들에 물욕을 가질 만한 여유 정도는 생겼다. 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독립적으로 사물들의 가치를 판단하고 오직 그 가치에만 현혹될 만한 삶의 여유는 생겼다.


소설에는 수많은 보바리가 나온다. 보바리 부친, 보바리 모친, 첫번째 보바리 부인, 보바리(샤를),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보바리 부인(엠마)까지.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보바리라는 이름을 통하여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샤를 보바리라는 인물을 책의 모든 사건들의 구심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다. 샤를 보바리는 소설의 극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소설의 전면에 나오는 일이 드물다. 장장 500페이지 내내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일도 적을 뿐더러 소설의 사건들에 전연 영향력이 없어 보인다. 보바리 모친에 의해, 첫번째 보바리 부인에 의해, 그리고 엠마 보바리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자족함으로 인해 오는 행복을 만끽함으로서 모든 일들에 타고난 둔감을 발휘한다. 그의 둔감한 성격과 천부적인 자족 능력은 엠마 보바리를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세상의 통념을 따르고 도덕을 지켜야지요"

                                        -소설 中


"보바리 부인 … ! 아! 모두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요 … ! 게다가 그건 당신 이름도 아니에요. 다른 남자의 이름이니까요!"

                                        -소설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엠마는 사실 허영은 엄두도 못 낼 집안의 소녀였다. 하지만 엠마로 살던 그녀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권태와 허영, 그리고 정조와 사회적 인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는 소설의 사건들과 그녀의 소비 습관 그리고 독서라는 여러 장치들을 통해 소설 곳곳에서 구체화된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런 대립의 양상과 그녀의 변화를 읽는 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정도로 저자는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하였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초중반 부 보바리 부인은 깊은 곳부터 뿌리깊게 잠식하고 있는 그녀의 권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마음 속으로는 허영과 일탈을 꿈꾸지만 언제나 그 기로에서는 자신의 정조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허영과 권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오히려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으려 한다. 물론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 역시 다른 간통한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 뒤의 형벌이며 대가이기도 한 비겁한 순종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中


'모든 게 거짓일 뿐! 미소 뒤에는 항상 권태의 하품이 감춰져 있고, 기쁨 뒤에는 저주가, 쾌락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으며 최상의 키스라 할지라도 더욱 큰 관능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만 입술 위에 남겨놓을 뿐이다.

        -소설 中



하지만 결국 그녀는 외부의 여러 자극과 자신의 내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허영과 권태를 마음껏 발산해 나간다. 한번 풀린 고삐는 좀 처럼 다시 채워질 수 없었다. 그녀는 사회 물정과 자신의 행동들에 복재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철부지이자 낭만주의자였다. 저자는 그녀에게, 혹은 낭만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차갑게 던진다. 아주 차갑게. 세상은 변했으며 더 이상 우리에게 낭만을 찾다가는 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낭만주의 대한 강한 일침을 가한다. 이 일침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며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착취의 고통에 의해 마취되어 있었던 그 당시 시민들의 낭만은 자꾸만 분출되어야 했다. 삶은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낭만으로의 향유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꿀 수 없다. 낭만을 꿈꾸지만 그 낭만을 위한 재물 탐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에 묶여있어야 한다. 저자가 당시 사물의 인식에 대한 변화를 얼마나 잘 꿰뚫고 있는지, 그리고 통찰은 문학 작품으로 얼마나 뛰어나게 승화시켰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놀라을 금할 수 없다.


보바리 부인.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텐션 높은 특별기획 드라마가 아닌 느린 전개속도와 끊임없는 예고들의 연속인 일일드라마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감과 몰입도가 아닌 얼마나 진짜인 것처럼 보여주느냐에 대해 저자는 집중한다 (실제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실제로 일어난 어느 부인의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과 세상의 진실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그의 아주 차가운 이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 그 이상의 깊은 여운과 무거운 당혹감을 나에게 선사했다.


보바리 부인의 파멸도 소름돋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는 보바리 부인의 파멸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없이 현실만을 직시하며 자기들의 낭만만을 채워나가려는 주변인물들을 부각시켰는데 그의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표현능력에 놀라움을 넘어 공포까지 느껴졌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가히 최고라고 할 만큼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이 당시 고발을 당할 정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생각없이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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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1859)

도서 2015. 8. 21. 00:43






두 도시 이야기 (1859), 찰스 디킨스





귀족과 농민들간의 갈등. 이를 뒤집으려는 이들의 광기. 프랑스의 귀족과 농민간의 뿌리깊은 갈등은 결국 그 임계점에 도달해 농민들은 자신들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 그리고 자유에 대한 억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자유'를 향한 프랑스 시민들의 의지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들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소설 中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시민 혁명 전과 후의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이다. 그 시대와 멀지 않은 시간에 살았던 찰스 디킨스는 서문에서 그는 가장 믿을만한 프랑스 혁명의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으며 독자들이 그 당시의 무시무시한 시대 상황을 쉽고도 생생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밝힌다. 그의 말대로 소설을 읽는 동안 그가 보여주려고 하였던 시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암흑빛 불꽃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은 꽤나 긴 분량과 긴 시간을 서술하고 있다. 주인공인 은행원 로리는 중년의 신사로 시작해서 이야기 끝부분에선 여든을 바라보는 노신사가 된다. 그 만큼 혁명의 전과 후의 두 도시(나라)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다양한 사건들을 서술하면서 그가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말들을 마무리 짓는다. 바로 일전에 읽었던 보르헤스의 '픽션들'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만큼 충분히 자세하게, 끈기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러한 그의 서술 방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이 소설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과 그것을 위한 적재적소의 편집능력과 복선이 두드러진다. 소설이 짧지도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러한 그의 치밀한 기술적인 요소가 오히려 전개에 대한 예측범위를 좁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찰스 디킨스는 예상치 못한 반전을 넣기보다는 짜임새 있게 시대극을 펼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상된 전개에서 오는 은은한 감동과 몰입도 강렬한 놀라움만큼이나 재밌는 것이기에. 책을 덮을 때의 가슴 먹먹한 감동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기운을 내요, 아가씨! 기운을! 이건 업무일 뿐이에요! 최악의 순간은 금방 지날 겁니다. 그저 문턱을 넘으면 돼요. 그러면 최악의 순간은 끝나는 거에요. … 이건 업무일 뿐이에요. 업무!"

"그저 업무일 뿐이에요, 업무!" 하지만 업무와 상관없는 눈물이 그의 뺨 위에서 반짝거렸다.

                                                       -소설 中


그는 루시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몸에 배인 절망과 자기 비하로 그만 분위기를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갔다.

"아닙니다. 마네트 양, 꿈을 꾸는 동안 저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고 무가치한 인간인지 알았습니다."

                                                       -소설 中



찰스 디킨스는 여러 가지 장치들로 인물들의 특징들을 영리하게 나타냈고 이들은 모두 사건의 진행과 변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 저마다의 트라우마나 열등감, 고난의 기억들이 사건들을 지배한다. 그가 소설의 '짜임새'에 얼마나 인위적인 관심을 쏟아부었는지 또 한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모두 꺼내놓다 보니 소설은 필요 이상으로 두꺼워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디킨스의 방식이 이해가 되었다. 카턴의 방식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감동이 내 마음을 지배한 것은 이러한 그의 장치들 덕분이었다.


주인공 로리의 태도와 다양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 그의 말버릇이 굉장히 재밌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늘 주인공들의 동료로서보다도 텔슨 은행의 은행원으로서 업무상의 명목과 의무에 따라 행동하려한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현대 정서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억지로 사적인 감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로리의 마음과 사무직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종종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로리는 감정이나 의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의 대외적인 행동들, 그렇지만 그 속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마음이 잘 표현되어있다. 인상깊은 부분이었다.


디킨스는 귀족들의 부당한 착취와 탐욕적인 처사를 여러 군데 풍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고고한 의지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도 결국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는, 오히려 분노로 인해 잔인한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자유를 향한 푸른빛 물결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그들만의 살육의 축제로 표현하였다. 저자도 결과론적인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쳤음을 고발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숭고한 의도와 부당한 일들의 원인으로도 그것들을 덮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다른 갈등과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현재 금권주의 사회에서 우리 시민들의 올바른 태도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인거 같다. 당연한 것들도 지켜지지 않는 부당한 상황에 대한 맞섬이 자칫 광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광기는 우리의 목적 의식을 불태운다. 현재 기업과 노동자들의 갈등 속에서 기업이라는 금권으로 인해 일어나는 부당한 처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노조라는 이름 뒤에 숨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자신들의 광기에 도취된 '프랑스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고쳐져야 할 것들이 두 집단에게서 얼마나 잊혀져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무고한 시민들은 얼마나 희생되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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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1941-1956)

도서 2015. 8. 13. 22:37








픽션들 (1941-1956),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그의 단편선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 1941년에 먼저 출간된 후 '기교들(Artifices)'이 1944년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에 추가되는 식으로 출간이 되면서 '픽션들(Ficciones)'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리고 1956년에 '기교들' 섹션에 세 작품 '끝', '불사조 교파', '남부'가 추가되었다. (위키백과)


총 열입곱 편의 소설은 모두가 짧은 단편으로 다 합쳐봐야 200페이지를 살짝 넘는 분량이다. 당시에 성행했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분량은 아쉬운 단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짧은 분량은 그의 천재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는 누구도 생각못할 다양한 이야기와 무시무시한 구성들로 '픽션들'을 채워놓았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서문 中



그는 평생을 도서관에서 일하고 도서관에서 살았다.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는 직업 또한 책에 관한 일들을 하는 직업이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을 보았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였겠는가. 그 수많은 책들과 인류의 역사를 읽고 있자니 그는 평범하고 장황하게 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특이한 사상과 특이한 구조를 책에 담고 싶었고 그것을 담기에 장편의 분량은 너무 쓸데없이 길고 지루하며 불필요했다고 느꼇던것 같다. 그래서 그는 색다른 구조와 간결한 문장 그리고 단어들의 중의적 사용과 기가 막히는 메타포로 단편들을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로 읽어도 재밌는 편이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곱씹어 보는 행위를 통해 제대로된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책에 담은 어떤 맹아적인 생각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 단편들을 읽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웠고 놀라웠으며 황홀했다.



'이러한 우주의 혼돈은 해결방법을 아는 사람-즉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에게는 완벽한 질서이지만, 이 혼란의 미로가 숨기는 해결방법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인간이거나 인간적인 존재-에게는 무질서한 혼돈의 구성물이다.'

                                                             -'픽션들(민음사)'에 수록된 작품 해설 中



그의 소설에서는 '확정'적인 것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의 픽션들은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허구에서의 허구로의 탐험도 불사한다. 그는 우주의 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우주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오히려 그 질서가 쉽게 해석되고 풀린다면 보르헤스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서는 더 이상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해독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듯 하다. '바벨의 도서관'의 메뉴얼의 존재나 '불사조 교파'의 '비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복권'의 복권들이 그 예이다.



단편집이기에 내용에 대한 감상들은 내가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나 적었던 메모들로 대체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그 때가 되면 지구상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보잘 것 없는 스페인어는 사라질 것이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아드로게에 있는 이 호텔에서 조용한 매일을 보내며 토머스 브라운 경의 "납골당 매장"을 케베도식으로 엉성하게 번역 해 놓은 원고(나는 이것을 출판할 생각이 없다.)를 계속 손보고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中


아마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우선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고 (픽션들의 가장 처음이야기이다) 그의 스타일을 가장 처음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제껏 이렇게 훌륭한 끝맺음을 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시작부터 시종일관 자유롭게 독자를 기만하는 보르헤스의 뛰어난 능력에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단편집을 열기에, 충격을 선사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놀라웠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너무나 담담하다. 그는 틀뢴의 '힘'과 '진실'을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계속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지금 이 이야기 속 현실 또한 시효가 될 것이며 잠정적인 무의미가 될 것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틀뢴의 백과사전 또한 그가 우연히 거울을 보면서 알아낸 인간의 상상물이라는 것, 즉 이 이야기 자체도 '틀뢴'일지 모른다는 저자의 기만적이고 발칙한 도발일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몰입을 순식간에 환기시켜주는 정말로 멋진 마무리였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필사적으로 한 힌두교도를 죽인다.(또는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中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이라는 이야기는 저자의 '주'로 이야기를 끝맺는 형식을 취한다. 이야기의 이러저러한 애매한 유사성들은 '찾는 주체'와 '찾는 대상'간의 애매한 경계성에서 비롯된다. 또한 '찾는 주체'가 '찾는 대상'에게 이미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알모타심이 법학생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흰두교도'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라는 대목에서 그가 알모타심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저자의 주에 들어가 있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멋진 문장이다. 찾으러 밖으로 나가는(두 개의 철길을 건너는) 것과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같은 철길을 두 번 건너는) 것의 모호한 경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혼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이유는 주인공도 알 수 없었다고 소설에서 나온다.) 알모타심을 쫓았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 정작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즉 '알모타심을 찾으려는 행위'는 '알모타심'을 자꾸 '나'로 변하게 했다. 즉 그를 죽이는 행위였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찾는 행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실험적인 기법과 짧은 분량으로 '존재들의 관념적인 인식과 절대성의 모호함'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잘 담았다는 것에 대해 경의로울 정도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영관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 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 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저작들은 지금 다시 읽음으로서 재창조된다. 그 책들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늘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재탄생하는 현재(現在)성을 지닌다.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저자였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돈키호테를 '옮기려다' 포기했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신성(神聖)의 우연성]


고귀한 신의 섭리는 있을 지 없을지 모르며 그 법칙도 우리가 만들었거나 동시에 신이 만들었다. 우리는 동일한 일을 '신의 섭리'라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어느 변칙적 사건이 발생해도 '신성' 앞에서는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숨은 회사의 실재(實在)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저자의 '신성'에 대한 사르카즘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일들도 '신의 이름으로' 의연히 받아들여지는 말도 안되는 세태를 비꼰 것은 아닐까? (현재 IS의 자행들을 본다면...)


                                             A thousand years of failure

A thousand years they bled To the bear, the blitzkrieg, and the holy father They just bowed their heads

From Lyrics of 'Still Echoes' by Lamb of God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독자는 해당되는 장들을 다시 살펴보고, 진짜로 맏는 해답인 다른 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범한 책의 독자는 책의 '탐점'보다 더 명민하다.'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中


<배신과 영웅에 관한 주제>

'이성적/논리적 사고'를 맹신하는 태도에 대한 보르헤스의 반박. 재밌게도 살인의 시작인 첫번재 사건은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였고 트레비라누스가 무심하게 툭 던졌든 그 말 그대로였다.


<불사조 교파>

종교적/관습적 '믿음'(혹은 문화이거나 습관이거나 전통이거나)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거나 말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이 '믿음'은 말로 설명되기 힘든 모호성을 지닌다. 어떨 때는 좁게 어떨 때는 전지구적으로 죽지 않고 여러 세대를 걸쳐 '영원'의 존재가 된다. 마치 불사조처럼 말이다. 비밀이라는 말로 이를 재밌게 표현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말로 아주 '정확하게' 규정해서는 안되는 '비밀'인 것이다. 규정한다면 매우 웃긴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예의를 지키고(혹은 예수에게 기도하고 부처에게 절하는) 하는 무언의 '비밀'들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치들에 맞게 조목조목 다 규정이 된다면 얼마나 웃긴 일이겠는가. 우리는 '비밀'로서 이것들을 이어나간다. 불사조 교파의 교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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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1943)

도서 2015. 8. 12. 20:58







어린 왕자 (1943),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눈물나게 아름다운 순수함의 멜랑꼴리


슬프다. 정말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생텍쥐페리의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정말 감명깊게 읽었다. 이 책을 쓰고 1년 뒤 어린 왕자에게로 떠나버린 저자를 생각한다면 이 책의 멜랑꼴리함는 더욱 더 크게 느껴지는 듯 하다.


어린 왕자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생텍쥐페리 자신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을 겪고 망명을 해야만 했고, 비행 중에서의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그의 마음 속에서는 사람들간의, 나아가 존재들간의 진정한 관계는 무엇인가 에 대한 울부짖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어린 왕자라는 인물을 통해 찾고자 했다.


동화 치고는 밝지 않은, 암울한 분위기와 진지함 그리고 마지막의 깊은 여운과 가슴 먹먹함은 이 책의 깊이를 더해준다. 어린왕자의 지구까지의 여정은 세태를 묘하게 꼬집으면서도 어린왕자의 순수한 모습을 재밌게 보여준다. 어린 왕자의 순수함 앞에서 자신들의 바오밥나무를 뽑내는 어른들의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대해 이해성이 있어야 한다.'


-어린 왕자 中, 생 텍쥐페리



하지만 어른들은 벌써 어린 왕자의 별을 너무 작게 만들어 버렸다. 어른들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이해해버리는 것은 너무 슬픈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별을 너무나 작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작은 별을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바오밥나무(어른들)의 침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선다. 그리고 그 대신에 그는 단 하나의 희망(장미)인 '사랑'을 심는다. 불행하게도 지구에 와서야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상자를 꿰뚫어 양을 볼 줄 모른다.'


-어린 왕자 中, 생 텍쥐페리



세상에서의 많은 사람들은(나를 포함한) 뱀 속의 코끼리나 상자 속의 양을 꿰뚫어 볼 줄 모른다. 아니 모르게 된다. 주인공이 6살 때 겪은 좌절은 우리가 만들어진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반성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 슬펐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슬펐고 세상이 그렇기에 슬펐다.


이 말로 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너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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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1952)

도서 2015. 8. 10. 20:27








노인과 바다 (1952) ,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4년 노벨상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그의 대표작. 길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짧은 편에 속하고 문체 또한 담담하며 간결하다. 하지만 그 안의 그의 강력한 의지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소설 中



책을 읽고 있을 때와 처음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노인의 미련함' 이나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비극적 결말' 이었다. 굳이 다른 고기가 많음에도, 다른 기회가 많음에도, 그리고 그 집착에 필요한 기회비용이 집착을 뛰어넘고 있음에도 오직 '그' 큰 청새치에만 집착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노인이 여간 미련해보이고 한심해보였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무시와 자신을 늘 따랐던 소년을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했음에 마음이 무너져갔다. 그는 장장 84일 그 곳에 바다와 단 둘이 있었다. 그는 노쇠해갔다. 그렇기에 그것은 노인의 미련한 탐욕이 아니라 노인의 자존감과 자존심의 문제였다. 자신의 노쇠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그렇기에 더 더욱 자신의 노쇠함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는 노인의 숭고함이 담겨 있었던 것이라고 느껴졌다. 얕은 장사꾼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귀함이다.



"그놈들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 만거야." 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기에게 지신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

"그렇지. 정말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

                                                    -소설 中



노인의 자존심은 미련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알기를 포기하고 외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인식한 것이다.


솔직하고 담담한 문체, 그리고 뛰어난 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대한 묘사 방법, 헤밍웨이에 대한 이 소설의 자전적인 요소 등, 이 소설은 아주 짧지만 강렬한 인상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바다와 노인과의 처절한 투쟁과 대화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는 노쇠한 노인이지만 항상 사자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 "

" a natural admiration for every individual who fights the good fight in a world of reality overshadowed by violence and death "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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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5),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대표격인 니체의 천재적인 저작. 인류 역사상 이토록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가 있었을까. 니체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의 변화를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 책이 보통 철학서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글의 형식은 다분히 고전적이고 문학적이다. 문체 또한 강렬함과 동시에 난해하기 때문에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며 읽어나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독해하는 것에 무척이나 얕은 경험과 내공을 가진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 마저도 힘들다. 그토록 아름다운 노래들의 연회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먼저 이 책에서 사용한 니체의 위와 같은 어느 정도 특이한 표현 방식은 그의 난해하고 고상한 사상을 더 더욱 난해하고 고상하게 표현해줌과 동시에 직접적인 언어들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한 차원 높은 말들에 대한 본질적인 깊은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차라투스트라의 사상과 이상은 천민(인간)의 말들로는 완벽히 표현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메타포를 찬양하고 메타포를 사랑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신을 죽이고 별들과 바다로 부터 떠나 '하강'하기를 원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대지로의 침잠을 원했던 것이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지향했던 'Ubermensch' 에 도달하려면 인간은 아주 새로운 이계의 무언가 (보통은 그것이 신이었다) 가 아니라 대지로의 침잠이 필요했다. 그의 실존주의를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인간들이 만든 신' 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실존'에 대한 울부짖음 이었다. 이것은 니체 본인의 삶에 대한 고뇌와 아픔에서도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이 된다. 10대까지 자신은 인간들의 '신'에 대해 공부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았다. 독실한 루터교도 였던 집안을 등지고 자신에게로 침잠하여 신을 기꺼이 죽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바깥에 있는 것들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그들 본연의 세계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니까."

                                               -데미안 中, 헤르만 헤세



그렇다면 니체는 왜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린 것일까. 그는 영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책의 시작에서 나오듯이 신이었다가 자신의 고독에 싫증을 느껴 인간에게 내려가는 계몽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던 존재이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발상을 모티브 삼아 이를 묘하게 비꼬면서 (이러한 사르카즘은 글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데 비꼬면 비꼴수록 그의 사상적인 열등감이 묘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웃음포인트라면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인간보다 우등한 무언가의 존재의 입을 빌린 것이다. 인간으로의 '내려감' (하강과 몰락 두 뜻을 지닌 독일어 'Untergang') 을 통해 신성과 인간성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한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면서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고상한 생각들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들에는 늘 자신감이 가득 차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인간에게의 일침, 과감한 메타포들은 모두 완벽한 진리는 아니며 오히려 광기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뒤에 숨어서 이러한 문제들을 교묘히 피해간 것이다. 우리는 니체를 비판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를 비판하여야 하는 것이다.



'제자가 대답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신뢰합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믿음은 나에게 축복을 주지 못해. 그가 말했다. 더욱이 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누가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다. 우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기다리고 바랐던 만큼 자신은 초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니체 본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 읽혀지기를 바랐고 사람들의 생각들이 영원회귀를 통한 파멸과 창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초인이 탄생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초인이 될 수 없음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이 책 또한 니체는 완벽할 수 없었음을 인정했고 고뇌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책(차라투스트라의 말) 또한 맹목적으로 진리라고 믿지 말라고 하고 있다. 실존주의적인 그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 책에서 니체가 하는 말, 즉 차라투스트라가 하는 말 또한 입 밖으로 나오면서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대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대지로 향하는 마음과 말들이 역설적으로 대지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실존하는 대지의 것만 자신의 눈으로 믿고 끊임없이 창조하는 일을 쉬지말라는 니체의 본질적인 의도를 파악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사상은 모두 그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철학적인 의미를 차치 하더라도 차라투스트라의 몸부림은 극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3부 후반부의 마음 깊이 울리는 감동은 이 책을 여지없이 위대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말로 표현 못할 깊은 떨림과 차라투스트라의 고뇌와 환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던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길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지질한 표현력에 안타까움이 생긴다.



사실 읽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고, 이토록 나의 감상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고 부끄러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생각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차라투스트라는 냉소를 띄우며 기쁘게 보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했다. 뭐 좀 틀리고 오해하면 어떤가. 초인으로 향한 길은 끊임없는 창조와 파멸의 길이 아니었던가...





p.s 1) 쇼펜하우어-니체-헤르만 헤세로 이어지는 고독의 계보를 따라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 책 또한 데미안과 더불어 여러번 더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을 한 번보고 이렇게 감상을 쓴 것을 나중에 본다면 나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다.

p.s 2)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니체의 사상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은 필요했고 즐거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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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1919)

도서 2015. 8. 2. 10:44





데미안 (1919), 헤르만 헤세



그저 경이로웠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도 살면서 한 번쯤 혹은 몇 번은 경건과 감사라는 미덕과의 갈등에 빠지는 일을 겪게 마련이다. 누구든  한 번은 자기를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은 걸음을 떼어야한다. 누구나 고독의 쓰라림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해 금방 그들 밑으로 다시 기어든다 하더라도 말이다."

                                                                     -소설中


첫번째는 '공감'이었다. 내가 청소년의 때에 이 책을 읽었다면 공감을 그리 많이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감각의 지평은 넓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에 감각의 확장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넓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예민하기 때문이 아닐까. 청소년 시기를 거쳐 20대 초중반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가 이 책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 이 책의 체험적인 요소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만 빨랐어도, 조금만 느렸어도... 그렇게 놀랍지는 못하였을 것 같다. 스스로를 혼자라 생각하는. 그러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고독에 침잠함으로서 자신의 자존감을 한없이 끌어올리는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끝없는 충동에 고뇌하고 당연하듯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라는 껍질에 고민하고 한번 깨보려하는 그의 모습에서. 매번 동경의 대상을 바꾸어 가며 그에게 가까워지려는, 오히려 그럼으로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슬프면서 기뻤다. 싱클레어는 자신을 혼자라고 하였지만, 난 혼자가 아닌거 같았다. 그런 위로가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거지. 바깥에 있는 것들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그들 본연의 세계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니까."

                                                            -소설中


두번째는 '표현'이었다. 누가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길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그의 몇 배에 해당하는 농도를 느꼈다.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표현들의 향연이었다. 이러한 표현을 읽고 있자면 그것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괴테가 "번역은 아름다우면 충실하지 않고 충실하면 아름답지 않다" 라고 했던 말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실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휙 들려 올라가 공중에 내던져진 것이었다. 비상하는 느낌은 근사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아 오른 것을 보자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소설中


이 책은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고 한동안 이 책의 저자는 헤르만 헤세가 아니었다. 아마 그의 삶과 싱클레어의 삶을 비교해 본다면 헤세 자신이 되고자 했던 삶을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썼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자신의 이력이 저자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고자 함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세계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끌어내라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헤세의 이상이 담긴 책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가 실제로 도달하지는 못했던 안타까운 그 이상을. 나 또한 그렇다. 내가 이 책에 공감을 하는 것이 내가 싱클레어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싱클레어가 아니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헤세는 자신의 고독을 불쌍히 여겨 그 고독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은 아닐까.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안갯속을 거니는 것은 신기하다

덤불과 돌은 저마다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다 홀로다.


내 인생이 아직 밝던 때는

세상은 친구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안개 내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어쩌지도 못하게

슬그머니 떼어놓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이는 모든 면에서

진정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안갯속을 거니는 것은 신기하다

산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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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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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2004)

도서 2015. 7. 25. 14:42





불안 (2004), 알랭 드 보통



원제는 'Status Anxiety'로 지위에 대한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이 주제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모든 불안을 해소하거나 더 잘 알기 위한 해결법을 적은 책은 아니기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을 보고 읽었다가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최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지위'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불안을 '분석'한 책이라 보는게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불안 中, 알렝 드 보통


원인, 해법으로 나누어져 있고 파트 별로 확실하게 구분되어져 있어 읽는 이의 생각을 정리하는데에 아주 유용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무감정한 담담한 어조.

사견의 최대한의 배제.

좋은 문장들의 연속.


저자의 무덤덤한 한마디 한마디의 호소력이 짙다. 주로 잘 알려진 책들을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조금씩 조금씩 설명해나가는데 그 과정의 문장들이 매우 좋다. 이 점에서 보편성과 대중성을 고루 잡은 느낌이다. 저자의 모든 논지를 생각해가며 집중해서 읽든, 그냥 재미로 읽든 어떻게 읽든지 간에 쉽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인 것 같다. 뭐 이 점이 너무 대중적이고 평범에서 텐션이 떨어진다라고 비판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느낌은 아닐 것 같지만..


누구에게도 추천할 만한 좋은 책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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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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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2003)

도서 2015. 7. 20. 20:29





연을 쫓는 아이 (2003), 할레드 호세이니




할레드 호세이니의 개인적인 내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출신으로 이 도시는 이 소설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된다. 평범하지 않은 배경의 여러 사건에 대한 사실적 서술에 타당성을 강력히 부여하는 부분이다. 글을 읽고 몰입하는 내내 작가의 출신과 소설의 자전적인 성격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격동의 시기들을 자주 접할 수는 없었기에.


아프가니스탄의 '특별한' 인물의 '특별한' 삶에 대한 소설이다. 평범한 인물의 평범한 삶이었다면 이렇게 5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 아닐 뿐더러 진작에 러시아군이 들어왔을 때 그는 죽어버렸다. 혹은 굶어 죽어버렸다.라는 식으로 끝났을 것이다.


어느 정도 사는 집안의 아미르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내면적인 변화와 죄책감이 아주 잘 서술된 책이다.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나라는 존재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바바와 그가 사란들의 삶에 남긴 흔적들에 의하 설명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평생 '바바의 아들' 이었다."


"용서는 화려한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이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짐을 꾸려 한밤중에 예고없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열등감을 가지고 살다가 그 감정들이 변화를 겪는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주인공 아미르는 소위 '인간쓰레기'라고 할만큼 열등감에 비롯한 쓰레기짓(달리 표현하지 못하겠다.)을 많이 한다. 그러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변해가는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거짓말로 뒤범벅이 된 자기자신을 온전히 인정하는 순간 그는 치유되었고 솔직해졌다. 나 또한 나 자신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고싶다는 생각을 불현듯 들게 만들었다.


문체가 평범해 읽기 쉬웠다. 수수하고도 순수한 카불의 풍경이 고스란히 머리에 그려졌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배경과 그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과 그들만의 전통, 관념들도 잘 나타나있어 좋았다.


아프가니스탄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

이와는 대비되는 미국에서의 삶.

늘 죄책감에 얽메여 고뇌하는 아미르.


다만 작가가 글의 전개에 있어 복선들이 다소 1차원적이고 쉽게 예측가능하게 만들어 긴장감을 떨어트렸다는 느낌이다. 조금 더 흥미진진하고 마음 졸이면서 보게끔 해도 괜찮았을텐데. 그리고 사실 주인공의 심리가 서술도 잘 돼있고 공감이 가지만서도 어느정도 개연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클리셰도 여러 부분 느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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