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5),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대표격인 니체의 천재적인 저작. 인류 역사상 이토록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가 있었을까. 니체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의 변화를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 책이 보통 철학서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글의 형식은 다분히 고전적이고 문학적이다. 문체 또한 강렬함과 동시에 난해하기 때문에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며 읽어나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독해하는 것에 무척이나 얕은 경험과 내공을 가진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 마저도 힘들다. 그토록 아름다운 노래들의 연회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먼저 이 책에서 사용한 니체의 위와 같은 어느 정도 특이한 표현 방식은 그의 난해하고 고상한 사상을 더 더욱 난해하고 고상하게 표현해줌과 동시에 직접적인 언어들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한 차원 높은 말들에 대한 본질적인 깊은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차라투스트라의 사상과 이상은 천민(인간)의 말들로는 완벽히 표현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메타포를 찬양하고 메타포를 사랑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신을 죽이고 별들과 바다로 부터 떠나 '하강'하기를 원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대지로의 침잠을 원했던 것이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지향했던 'Ubermensch' 에 도달하려면 인간은 아주 새로운 이계의 무언가 (보통은 그것이 신이었다) 가 아니라 대지로의 침잠이 필요했다. 그의 실존주의를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인간들이 만든 신' 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실존'에 대한 울부짖음 이었다. 이것은 니체 본인의 삶에 대한 고뇌와 아픔에서도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이 된다. 10대까지 자신은 인간들의 '신'에 대해 공부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았다. 독실한 루터교도 였던 집안을 등지고 자신에게로 침잠하여 신을 기꺼이 죽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바깥에 있는 것들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그들 본연의 세계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니까."

                                               -데미안 中, 헤르만 헤세



그렇다면 니체는 왜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린 것일까. 그는 영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책의 시작에서 나오듯이 신이었다가 자신의 고독에 싫증을 느껴 인간에게 내려가는 계몽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던 존재이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발상을 모티브 삼아 이를 묘하게 비꼬면서 (이러한 사르카즘은 글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데 비꼬면 비꼴수록 그의 사상적인 열등감이 묘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웃음포인트라면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인간보다 우등한 무언가의 존재의 입을 빌린 것이다. 인간으로의 '내려감' (하강과 몰락 두 뜻을 지닌 독일어 'Untergang') 을 통해 신성과 인간성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한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면서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고상한 생각들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들에는 늘 자신감이 가득 차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인간에게의 일침, 과감한 메타포들은 모두 완벽한 진리는 아니며 오히려 광기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뒤에 숨어서 이러한 문제들을 교묘히 피해간 것이다. 우리는 니체를 비판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를 비판하여야 하는 것이다.



'제자가 대답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신뢰합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믿음은 나에게 축복을 주지 못해. 그가 말했다. 더욱이 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누가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다. 우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기다리고 바랐던 만큼 자신은 초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니체 본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 읽혀지기를 바랐고 사람들의 생각들이 영원회귀를 통한 파멸과 창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초인이 탄생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초인이 될 수 없음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이 책 또한 니체는 완벽할 수 없었음을 인정했고 고뇌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책(차라투스트라의 말) 또한 맹목적으로 진리라고 믿지 말라고 하고 있다. 실존주의적인 그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 책에서 니체가 하는 말, 즉 차라투스트라가 하는 말 또한 입 밖으로 나오면서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대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대지로 향하는 마음과 말들이 역설적으로 대지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실존하는 대지의 것만 자신의 눈으로 믿고 끊임없이 창조하는 일을 쉬지말라는 니체의 본질적인 의도를 파악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사상은 모두 그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철학적인 의미를 차치 하더라도 차라투스트라의 몸부림은 극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3부 후반부의 마음 깊이 울리는 감동은 이 책을 여지없이 위대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말로 표현 못할 깊은 떨림과 차라투스트라의 고뇌와 환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던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길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지질한 표현력에 안타까움이 생긴다.



사실 읽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고, 이토록 나의 감상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고 부끄러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생각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차라투스트라는 냉소를 띄우며 기쁘게 보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했다. 뭐 좀 틀리고 오해하면 어떤가. 초인으로 향한 길은 끊임없는 창조와 파멸의 길이 아니었던가...





p.s 1) 쇼펜하우어-니체-헤르만 헤세로 이어지는 고독의 계보를 따라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 책 또한 데미안과 더불어 여러번 더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을 한 번보고 이렇게 감상을 쓴 것을 나중에 본다면 나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다.

p.s 2)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니체의 사상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은 필요했고 즐거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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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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