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8.12.01 보통의 존재 (2009)
  2. 2018.03.26 쇼코의 미소 (2016)
  3. 2015.10.21 이방인 (1942)
  4. 2015.10.15 롤리타 (1946)
  5. 2015.10.07 그리스인 조르바 (1946)
  6. 2015.09.06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0)
  7. 2015.09.01 보바리 부인 (1857)
  8. 2015.08.21 두 도시 이야기 (1859)
  9. 2015.08.13 픽션들 (1941-1956)
  10. 2015.08.12 어린 왕자 (1943)

보통의 존재 (2009)

도서 2018. 12. 1. 10:29









보통의 존재 (2009), 이석원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아무튼 살아 보자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때론 이렇게 사는 것은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녀에 대하여 中, 요시모토 바나나


내가 내 인생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도, 그저 줄이고 숨고 하는 것도, 겁쟁이에 못난 나인 것을 들키기 싫은 옹졸한 허세인 줄 나는 안다. 껍질 뿐인 장식품으로 나를 감쌀 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음 됐어'라고 별 수 없다는 듯 체념한다. 애초에 내 주제를 파악한 나에 대한 기대따위, 목표따위 없어져 버렸고, 끊임없는 자신을 향한 타자화와 객관화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중이었다. 이건 스스로를 향한 잔인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누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나 당신에게는 당신이 하루에 문자가 한 통도 안오는 외톨이임을 세상에 밝히지 않을 권리가 있고, 남들에겐 절대로 알릴 수 없는 치졸하고 계산적인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가질 자유가 허용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결코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당신만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반면 이 글들에서 내가 매력을 느낀 것은. 작가는 솔직하게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서이다. 자신을 포장하고 감출려는 허세 없이, 그 껍질없이 담백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내가 쓰는 단 몇 자의 글들에서도, 아주 사소한 내 행동들 속에도, 나에 대한 방어와 자기변호와 자기합리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허세와 방어기제를 제거하고 싶어도 잘 없어지지 않더라. 그래서 작가가 멋있었다. 충분히 안쓰럽고 불행해보일 수도 있는 상황들에 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분명 나의 생에 무언가 엄청난 결핍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구멍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아니 채우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생의 유한함을 절실히 목도한 후 비로소 삶에 생명력과 애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생토록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가 그제서야 하고 싶은게 생겨나더군요.



아무런 일들이나 변화가 없었으면 했던,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었던, 그저 내일에 대한 기대와 간절함보다는 밋밋한 오늘 하루에 만족해갔던 내 삶에 대해 변해가고 싶었던걸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조급해하지 않으며, 또한 나를 잃지도 않으면서 변해가고 싶었다. 나는 하나씩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이 책에서. 물론 이 책의 모든 글들이, 모든 사견들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감하고 위로를 받은 것에 대해서 부정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도 '보통의 존재'로 남아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희망을 주고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을 뿐이다.


작가가 경험한 많은 감정들에 나는 궁금증과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많은 감정들에 대한 보통의 존재로서의 개인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그럼에도, 우리가 작가의 이런 고집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옳다고 강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작가는 자신의 사견에 누군가의 공감을 끌여드릴 의도를 내비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누군가의 진심의 위로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고 그냥 그렇게 있어만 달라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들을 이 책을 비롯하여 나에게 선물하여 주었고, 비어있는 내 삶의 곳곳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칠해나가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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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2016)

도서 2018. 3. 26. 22:01




쇼코의 미소 (2016), 최은영








담담한 듯 무던하게 속을 가득 채운 최은영의 단편소설 꾸러미. 현대인의 묘한 심리상태를 기가 막히게 묘사하였고 인간관계에 대한 바램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공감이 잘 담겨져 있다. 계속된 대비 속에서도 드러나는 현대인의 모순된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순되기에 더 진짜 같았다.



나는 쇼코의 웃음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쇼코는 정말 우스워서 웃는게 아니라, 공감을 해서 고개를 끄덕이는게 아니라, 그냥 상대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았다.

-쇼코의 미소 中, 최은영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계속 집중해서 읽게 되는 이유는 '공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들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문장들로 나열되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문장들에 대한 거부감 없이 그 감정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작가는 감정을 잘 담아내었고 그러한 현실에서의 불편한 감정들을 잘 캐치해놓았다. 나만이 느꼈을 거라는, 나만이 힘들었을거라는 그러한 감정들이 보편적인 평범한 감정들이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누구나 그렇구나 라고.



처음에는 투이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그애가 다시 돌아온다는 걸 알고는 나도 내 속도대로 걸었다.

여느 때처럼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쇼코의 미소 中, 최은영



그래서 읽고 있으면 궁금증이 생긴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과 드라마들을 이렇게도 현실감있게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물들을 그리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문장 하나 하나가 내게는 공감 그 자체였다. 인간관계를 믿을 수가 없어서, 도무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모든 글자들이 내 마음을 바스라뜨리고 지나갔다. 마음에 꽉 막힌 무언가가 있는데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마음 속의 울음이 지속된 채로 읽어 나갔다.


수수하고 꾸밈없는 문체 속에서 담담하게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아무런 역량적 부족함이 없이 담아낸 것 같아 좋았다. 문장 하나 하나 내가 소비해 나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들은 좋았고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그 문장들을 다시 느끼려 읽은 곳을 읽고 또 읽었다. 지금 나에게 조각난 가치관들을 이어줄 것이 과연 '사실'일까, '신념'일까, '공감'일까 라는 고민 속에서 나는 '공감'이 정말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들을 해결해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이 좋았다.







그는 언제나 내가 자신을 '만나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했고, 그를 조금 경멸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에대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더라도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과소평가했고, 겸손을 넘어서 가혹할 정도로 자신에게 인색했다.


내가 이 남자에게서 나를 강하게 느낀 것은, 공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이 남자가 특이해서가 아니라 모든사람이 이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사람에 자신이 없는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건 누구나겠지.


-쇼코의 미소 中  한지와 영주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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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942)

도서 2015. 10. 21. 19:17







이방인 (1942), 알베르 카뮈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듯이 예부터 인간은 홀로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간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없이 온전히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정적인 유대를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모두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 짧은 분량의 소설으로 알베르 카뮈의 창작 센스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세운 뫼르소라는 인물과 책의 전반적인 문체와 분위기 그리고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은 기가막힌 제목 L'etranger까지.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적인 사상과 당시 격변의 세태 또한 책의 이해를 도와준다.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야 카뮈의 '이방인'이 더욱 더 와닿는 것을 본다면 그의 통찰력에도 감탄을 하게 된다.


소설 자체는 매우 짧고 간단하다. 민음사 본을 읽는 사람들은 더 그렇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소설 뒤에 꽤 긴 분량의 작품 해설과 카뮈의 후기를 담은 편지 등이 실려있기 때문에 책의 두께로 소설의 진행 정도를 예상하는 이에게는 갑작스런 결말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른바 '감정 낭비' 이것이 내가 살아옴에 있어 늘 이해하지 못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다. 굳이 나의 감정 표출이 일들의 인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감정은 오히려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에 굳이 표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도리어 내가 그러한 일에 대해 화가 나야할, 슬퍼야할 이유 조차 모르는 나의 둔함은 오히려 나 스스로에의  귀중한 축복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 책을 읽으며 뫼르소의 매력에 이끌렸던 것도 이러한 일종의 공감에서 였지 않았나 싶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건 엄마의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늘 말하기를,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방인 中, 알베르 카뮈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이방인 中, 알베르 카뮈



뫼르소라는 인물은 철저히 정서적으로 strange한 인물이다. 그의 속내는 누구의 공감도 바라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의 삶의 방식에 적잖은 공감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의 매력은 배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뫼르소는 오히려 그러한 감정적인 백지 상태때문에 다른 인물들과의 몇몇 관계에서 매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매력에 끌린 주변인물들을 주의해서 보는 것과 동시에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뫼르소의 속내를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요소였다. 그러면서도 세세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재치있는 표현들도 좋았다. 사실 난 이 소설을 꽤나 웃으면서 읽었다.


카뮈가 밝혔듯이 그의 계획된 시리즈 중 이 소설의 테마는 '부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에 갖혀 그의 본의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 그 행동을 판단하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서로의 이방인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누구나 남들이 이해 못할 '태양' 하나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결백하지 못한 뫼르소에 대한 동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실제는 그가 방아쇠를 쏘았다는 것이고 불쌍한 아랍인은 그 총격에 죽었으니...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2부의 감옥에서의 뫼르소의 심경 묘사와 자아내는 분위기는 가히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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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1946)

도서 2015. 10. 15. 22:14





롤리타 (1946), 블라디미르 나로코프






소설에서는 그 소설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나 저자가 의도적으로 담은 저자의 사상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하나의 허구, 즉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들이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 그것들을 숨겨놓는 것이다. 이것이 논문이나 에세이에 대비되는 소설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찾아내지 않는 이상 그저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글이기도 하다. 이성으로만 가득찬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언가 이상하고 무언가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야 한다. 조르바를 읽고 썼던 글에서도 밝혔듯이 아주 특이할 것 없이 일상적이고 논리적인 필연들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사소한 잡담 속 이야기들도 우리가 이해 못 할, 예상 못 할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닌가.

블라디미르 나로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씀에 앞서 이렇게 장광설로 시작한 것은 롤리타라는 이야기가 후자 쪽임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딱히 느낀점을 길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코멘트 했듯이 나로코프는 이 소설에 그 어떠한 메시지나 사상도 담지 않았다고 한다. 롤리타에서 그저 이야기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라는 의도로 한 말인 것이다. 이 소설의 소재에 대한 맹렬한 비난를 피하기 위한 자기변호이기도 한 것 같지만서도...

그렇다면 감상은 매우 단순해진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가, 잘 쓰여졌는가에 대한 느낌만 남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천재적이다. 문체가 엄청나게 대범한데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쓰여진 그 어느 글과 비교해도 완성도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처절하다. 작가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위트있는 다양한 고전과 현대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패러디와 언어 유희로 넘치고 리얼리즘의 형식적인 요소들도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함이 돋보인다기 보다는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여유가 느껴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문학동네 판의 미주를 하나하나 맞춰보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를 도와줬다.


그런데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 손에 쥐여준 환상적인 선물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리하여 나는 저물어가는 저녁의 가랑비를 뚫고 달려갔는데, 앞유리 와이퍼가 전속력으로 움직였지만 쏟아지는 내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로틱과 로맨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반전과 안타까움, 그리고 간절하고 처절한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고 아주 깊은 여운을 준다. 단순히 험버트 험버트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스캔들로 치부하기에는 이 책의 그 이외의 요소들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이런 특이한 소재가 이 책의 여러 요소들의 시너지를 돕는다라고 생각이 들 만큼 나는 나로코프의 매력에 설득되었다.

간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여운 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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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1946),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은, 유명한 유수의 소설들은 독특한 인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우연이 포함되지 않은 필연과 논리의 세상은 그 자체로도 따분하고 독자들의 흥미 유발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악재인가 보다. 데미안, 안나 카레리나, 마담 보바리, 달과 식스펜스 등등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진다. 독특한 인물의 등장은 어떻게 보면 저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필수의 재료인 것이다. 여러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인물들의 독특한 사상과 행동들이 한데 섞여 머리 속에 남으면서 미묘한 클리셰를 만들기 마련이다. 처음 스트릭랜드를 만났을 때의 감명과 충격 그리고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다졌던 각오는 이제는 다른 인물들을 만날 때의 식상함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출생과 생애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실제로 광산 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에 갔었으며 그 곳에서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이 점이 소설의 독특한 식상함을 변호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소설은 식상했다.) 자유와 실존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조르바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소설의 서술자의 회고적인 문체와 서술자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나만 믿지. 내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나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나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다시 글의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조르바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조르바라는 인물은 그-소설의 서술자. 소설의 저자 혹은 독자로 까지 확장해도 무방할-가 정작 실천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욕망과 사상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우리는 조르바의 괴팍한 사상과 행동에 공감을 하고 몰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화자의 행동과 사상에 공감을 하면서 몰입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조르바가 될 수 없기에 조르바의 행동들에 동경을 보낸다. 진정한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방구석의 한심한 책벌레로서. 이러한 특징이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미묘하게 겹친다. 하지만 조르바는 데미안과 다르게 자신의 고상한 신념보다는 일차원적이고 마쵸적인 본능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본능과 욕망은 모든 윤리적인, 종교적인 것들을 뛰어넘어 오히려 그것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

단순히 인물들간의, 크레타 섬의 작은 마을의 차원을 넘어서 그가 목격해왔던 격동의 시기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단순한 조르바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민들의 시선과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할 수 없는 수많은 행동들을, 보통 사람이라면 고뇌하고 그 실천을 결국 기꺼이 포기해야 했을 그런 행동들을 조르바는 스스럼없이 행한다. 서로에게 강요하는, 어쩌면 인간들끼리 만들어버린 굴레에 우리가 스스로 갖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저자는 '자유'라는 단어보다는 '조르바'라는 말로 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1,2차 대전과 그리스에서의 격동 등을 겪으면서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의 답을 조르바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굴레에 의해 진짜 중요한 단순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소설은 꽤나 두껍다만 읽고 나면 두꺼운 양 만큼의 생각이나 줄거리가 머리 속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저자가 글을 멋들어지고 아름답게 쓴편도 아니거니와 소설 자체는 매우 평면적이고 어쩌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이 재밌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점은 저자의 역량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가 정말로 실화 그대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을 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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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0), 신영복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인범이 되었고 종신형을 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레닌, 마르크스, 모택동의 저서를 읽는 것을 넘어 학교 후배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껴쓰고 돌려 읽게 하였고 김질락의 본의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김질락과 일종의 사상적 친분관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통혁당 사건의 핵심인물과의 관계와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는 해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되어 무기징역수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총의 방아쇠만 당기지 않았을 뿐이지 그 살인사건의 모든 알리바이를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앤디 듀프레인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억울한 심정도, 재판부가 마냥 견강부회 했던 것만도 아닌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저자의 억울한 심정과 그 긴 긴 옥살이를 그가 어떻게 승화시켰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사연을 먼저 공감해야 했다. 그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의 억울함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나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20년. 조금만 보태면 내가 지금껏 살아온 나의 나이만큼 옥벽 사각상자 안에 갖혀있었던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없을 뿐더러 그 수감기간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기에 있어서도 겸허해지게 만드는 시간이다.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책 中


영석에게

내가 있는 감방의 벽에, 누군가가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나는 이 때에 찌들은 '낙서'를 네게 전하고 싶다. 흥미 있는 일과 가치 있는 일의 차이는, 곧 향락과 창조의 차이이며, 결국 소(消), 장(長)의 차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책 中



저자의 30대 그리고 40대에 걸친 인생에 대한 사색과 글들은 그가 수감생활을 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한결같은 자기 반성과 자기 계발에 대한 의지는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면 저자의 글이 뒤로 가면 갈수록 깊어지고 은은한 여운이 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20년 옥살이만 한 이에게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감옥이라는 곳이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해 많은 것이 단절되고 결핍된 곳이기 때문에 사색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이 된다. 혹자는 너무 진지한 것이 아니냐, 당연하거나 작은 일들을 너무 혼자 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감옥에서부터의' 사색 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없이 장기간 동안 무의무탁의 상태에 있을 때 나 자신이 괜히 진지해지고 사색적이 되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색은 위 혹자의 말처럼 판단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 무엇보다도 인생의 소중한 밑거름일 것이다. 그의 소중한 사색들을 읽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 사색을 통해서 새로운 사색을 해보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책 中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워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책 中



저자의 시적인 표현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통찰에서오는 깊은 공감도 느낄 수 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소중하여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와 그의 독서 풀(pool)에서 비롯되는 동양미 넘치는 글들을 읽으면서 한동안 해외고전과 번역체에 둘러싸였던 나에게 좋은 여운들을 남겨주었다. 특히 마지막 편지의 여운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20년 동안이나 혼자 날 수 없었던 새끼 참새.



아래에는 책의 <한 발 걸음>을 읽다가 적어보았던 생각을 덧붙여본다.

 


 

<직립 보행>


현대사회는 로봇의 시대이다. 인간의 노동력 그 이상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지닌 로봇은 인간이 해왔던 수많는 노동을 대체해왔다.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화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직립보행을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한다. 그 단순한 동작들 속에 중심을 잡는 우리들의 몸의 아주 복잡한 역학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인식과 실천. 이 두 다리의 직립보행은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힘든 움직임이다. 실천이라는 다리를 쓰지 못하고 외발걸음으로 천천히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나는 늘 실천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두려워한다. 아니 현실에 안주하기를 달가워하며 이러한 퇴영적 안주 속에서 자족한다. 20대 초반 수많은 실천으로의 나의 도전은 나의 서툼때문인지 나의 성격때문인지 수없이 나 자신에 의해 짖밟혔고 나는 결국 한 다리를 절게 되었다. 내가 과연 두 다리를 딛고 설 수 있을 지에 대한 불안함에 나의 용기는 사라져간다. 오히려 두 다리로 걸으려 했던 스무살의 걸음마를 포기해서 그런지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영영 한 다리를 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 겁이 난다. 기실 아파야 되는 것이거늘 나는 아플 것에 겁이나 그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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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1857)

도서 2015. 9. 1. 01:53








보바리 부인 (1857), 귀스타브 플로베르








권태와 향락 그리고 파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은 직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두 세계관의 연속성이 묘하게 두 소설을 갈라놓는다.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혁명 이후 점차 나아지는 삶의 빈곤, 이 시간적인 배경의 불연속점은 두 리얼리즘 소설들의 사상적 틀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연에 감사했다.


귀족이 아닌 평민 샤를 보바리의 자족과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프랑스 혁명 이후 굉장히 안정되고 절대적인 삶의 질이 상향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하나의 현상이다. 예전의 착취 속에선 보바리의 모친이 그의 장래를 위해 뒷바라지 하는 그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엠마 보바리의 허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녀의 허영 또한 혁명 이전 시기의 지나친 착취에 시달리던 평민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여유' 였을 것이다. 치열하게 삶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와 어느 정도 안락한 삶에서의 권태와 허영에 관한 이야기가 불과 몇 십년의 텀을 두고 개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책 'Status Anxiety'에서 말했듯이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샤를 보바리, 엠마 보바리, 그리고 용빌에 많은 주민들 같은 문학적 인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농민들이 당장 닥쳐오는 빈곤과 궁핍에 한끼한끼 걱정하며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던, 그렇기에 자크들 서로들에게는 따스했던 생탕투앙과 달리 융빌의 주민들은 가식에 숨어 서로에게 표면적으로 따스한 척하지만 사물들에 물욕을 가질 만한 여유 정도는 생겼다. 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독립적으로 사물들의 가치를 판단하고 오직 그 가치에만 현혹될 만한 삶의 여유는 생겼다.


소설에는 수많은 보바리가 나온다. 보바리 부친, 보바리 모친, 첫번째 보바리 부인, 보바리(샤를),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보바리 부인(엠마)까지.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보바리라는 이름을 통하여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샤를 보바리라는 인물을 책의 모든 사건들의 구심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다. 샤를 보바리는 소설의 극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소설의 전면에 나오는 일이 드물다. 장장 500페이지 내내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일도 적을 뿐더러 소설의 사건들에 전연 영향력이 없어 보인다. 보바리 모친에 의해, 첫번째 보바리 부인에 의해, 그리고 엠마 보바리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자족함으로 인해 오는 행복을 만끽함으로서 모든 일들에 타고난 둔감을 발휘한다. 그의 둔감한 성격과 천부적인 자족 능력은 엠마 보바리를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세상의 통념을 따르고 도덕을 지켜야지요"

                                        -소설 中


"보바리 부인 … ! 아! 모두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요 … ! 게다가 그건 당신 이름도 아니에요. 다른 남자의 이름이니까요!"

                                        -소설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엠마는 사실 허영은 엄두도 못 낼 집안의 소녀였다. 하지만 엠마로 살던 그녀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권태와 허영, 그리고 정조와 사회적 인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는 소설의 사건들과 그녀의 소비 습관 그리고 독서라는 여러 장치들을 통해 소설 곳곳에서 구체화된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런 대립의 양상과 그녀의 변화를 읽는 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정도로 저자는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하였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초중반 부 보바리 부인은 깊은 곳부터 뿌리깊게 잠식하고 있는 그녀의 권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마음 속으로는 허영과 일탈을 꿈꾸지만 언제나 그 기로에서는 자신의 정조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허영과 권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오히려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으려 한다. 물론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 역시 다른 간통한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 뒤의 형벌이며 대가이기도 한 비겁한 순종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中


'모든 게 거짓일 뿐! 미소 뒤에는 항상 권태의 하품이 감춰져 있고, 기쁨 뒤에는 저주가, 쾌락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으며 최상의 키스라 할지라도 더욱 큰 관능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만 입술 위에 남겨놓을 뿐이다.

        -소설 中



하지만 결국 그녀는 외부의 여러 자극과 자신의 내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허영과 권태를 마음껏 발산해 나간다. 한번 풀린 고삐는 좀 처럼 다시 채워질 수 없었다. 그녀는 사회 물정과 자신의 행동들에 복재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철부지이자 낭만주의자였다. 저자는 그녀에게, 혹은 낭만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차갑게 던진다. 아주 차갑게. 세상은 변했으며 더 이상 우리에게 낭만을 찾다가는 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낭만주의 대한 강한 일침을 가한다. 이 일침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며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착취의 고통에 의해 마취되어 있었던 그 당시 시민들의 낭만은 자꾸만 분출되어야 했다. 삶은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낭만으로의 향유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꿀 수 없다. 낭만을 꿈꾸지만 그 낭만을 위한 재물 탐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에 묶여있어야 한다. 저자가 당시 사물의 인식에 대한 변화를 얼마나 잘 꿰뚫고 있는지, 그리고 통찰은 문학 작품으로 얼마나 뛰어나게 승화시켰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놀라을 금할 수 없다.


보바리 부인.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텐션 높은 특별기획 드라마가 아닌 느린 전개속도와 끊임없는 예고들의 연속인 일일드라마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감과 몰입도가 아닌 얼마나 진짜인 것처럼 보여주느냐에 대해 저자는 집중한다 (실제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실제로 일어난 어느 부인의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과 세상의 진실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그의 아주 차가운 이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 그 이상의 깊은 여운과 무거운 당혹감을 나에게 선사했다.


보바리 부인의 파멸도 소름돋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는 보바리 부인의 파멸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없이 현실만을 직시하며 자기들의 낭만만을 채워나가려는 주변인물들을 부각시켰는데 그의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표현능력에 놀라움을 넘어 공포까지 느껴졌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가히 최고라고 할 만큼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이 당시 고발을 당할 정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생각없이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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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1859)

도서 2015. 8. 21. 00:43






두 도시 이야기 (1859), 찰스 디킨스





귀족과 농민들간의 갈등. 이를 뒤집으려는 이들의 광기. 프랑스의 귀족과 농민간의 뿌리깊은 갈등은 결국 그 임계점에 도달해 농민들은 자신들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 그리고 자유에 대한 억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자유'를 향한 프랑스 시민들의 의지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들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소설 中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시민 혁명 전과 후의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이다. 그 시대와 멀지 않은 시간에 살았던 찰스 디킨스는 서문에서 그는 가장 믿을만한 프랑스 혁명의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으며 독자들이 그 당시의 무시무시한 시대 상황을 쉽고도 생생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밝힌다. 그의 말대로 소설을 읽는 동안 그가 보여주려고 하였던 시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암흑빛 불꽃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은 꽤나 긴 분량과 긴 시간을 서술하고 있다. 주인공인 은행원 로리는 중년의 신사로 시작해서 이야기 끝부분에선 여든을 바라보는 노신사가 된다. 그 만큼 혁명의 전과 후의 두 도시(나라)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다양한 사건들을 서술하면서 그가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말들을 마무리 짓는다. 바로 일전에 읽었던 보르헤스의 '픽션들'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만큼 충분히 자세하게, 끈기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러한 그의 서술 방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이 소설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과 그것을 위한 적재적소의 편집능력과 복선이 두드러진다. 소설이 짧지도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러한 그의 치밀한 기술적인 요소가 오히려 전개에 대한 예측범위를 좁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찰스 디킨스는 예상치 못한 반전을 넣기보다는 짜임새 있게 시대극을 펼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상된 전개에서 오는 은은한 감동과 몰입도 강렬한 놀라움만큼이나 재밌는 것이기에. 책을 덮을 때의 가슴 먹먹한 감동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기운을 내요, 아가씨! 기운을! 이건 업무일 뿐이에요! 최악의 순간은 금방 지날 겁니다. 그저 문턱을 넘으면 돼요. 그러면 최악의 순간은 끝나는 거에요. … 이건 업무일 뿐이에요. 업무!"

"그저 업무일 뿐이에요, 업무!" 하지만 업무와 상관없는 눈물이 그의 뺨 위에서 반짝거렸다.

                                                       -소설 中


그는 루시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몸에 배인 절망과 자기 비하로 그만 분위기를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갔다.

"아닙니다. 마네트 양, 꿈을 꾸는 동안 저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고 무가치한 인간인지 알았습니다."

                                                       -소설 中



찰스 디킨스는 여러 가지 장치들로 인물들의 특징들을 영리하게 나타냈고 이들은 모두 사건의 진행과 변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 저마다의 트라우마나 열등감, 고난의 기억들이 사건들을 지배한다. 그가 소설의 '짜임새'에 얼마나 인위적인 관심을 쏟아부었는지 또 한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모두 꺼내놓다 보니 소설은 필요 이상으로 두꺼워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디킨스의 방식이 이해가 되었다. 카턴의 방식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감동이 내 마음을 지배한 것은 이러한 그의 장치들 덕분이었다.


주인공 로리의 태도와 다양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 그의 말버릇이 굉장히 재밌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늘 주인공들의 동료로서보다도 텔슨 은행의 은행원으로서 업무상의 명목과 의무에 따라 행동하려한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현대 정서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억지로 사적인 감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로리의 마음과 사무직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종종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로리는 감정이나 의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의 대외적인 행동들, 그렇지만 그 속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마음이 잘 표현되어있다. 인상깊은 부분이었다.


디킨스는 귀족들의 부당한 착취와 탐욕적인 처사를 여러 군데 풍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고고한 의지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도 결국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는, 오히려 분노로 인해 잔인한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자유를 향한 푸른빛 물결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그들만의 살육의 축제로 표현하였다. 저자도 결과론적인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쳤음을 고발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숭고한 의도와 부당한 일들의 원인으로도 그것들을 덮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다른 갈등과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현재 금권주의 사회에서 우리 시민들의 올바른 태도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인거 같다. 당연한 것들도 지켜지지 않는 부당한 상황에 대한 맞섬이 자칫 광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광기는 우리의 목적 의식을 불태운다. 현재 기업과 노동자들의 갈등 속에서 기업이라는 금권으로 인해 일어나는 부당한 처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노조라는 이름 뒤에 숨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자신들의 광기에 도취된 '프랑스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고쳐져야 할 것들이 두 집단에게서 얼마나 잊혀져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무고한 시민들은 얼마나 희생되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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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1941-1956)

도서 2015. 8. 13. 22:37








픽션들 (1941-1956),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그의 단편선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 1941년에 먼저 출간된 후 '기교들(Artifices)'이 1944년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에 추가되는 식으로 출간이 되면서 '픽션들(Ficciones)'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리고 1956년에 '기교들' 섹션에 세 작품 '끝', '불사조 교파', '남부'가 추가되었다. (위키백과)


총 열입곱 편의 소설은 모두가 짧은 단편으로 다 합쳐봐야 200페이지를 살짝 넘는 분량이다. 당시에 성행했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분량은 아쉬운 단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짧은 분량은 그의 천재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는 누구도 생각못할 다양한 이야기와 무시무시한 구성들로 '픽션들'을 채워놓았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서문 中



그는 평생을 도서관에서 일하고 도서관에서 살았다.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는 직업 또한 책에 관한 일들을 하는 직업이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을 보았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였겠는가. 그 수많은 책들과 인류의 역사를 읽고 있자니 그는 평범하고 장황하게 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특이한 사상과 특이한 구조를 책에 담고 싶었고 그것을 담기에 장편의 분량은 너무 쓸데없이 길고 지루하며 불필요했다고 느꼇던것 같다. 그래서 그는 색다른 구조와 간결한 문장 그리고 단어들의 중의적 사용과 기가 막히는 메타포로 단편들을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로 읽어도 재밌는 편이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곱씹어 보는 행위를 통해 제대로된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책에 담은 어떤 맹아적인 생각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 단편들을 읽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웠고 놀라웠으며 황홀했다.



'이러한 우주의 혼돈은 해결방법을 아는 사람-즉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에게는 완벽한 질서이지만, 이 혼란의 미로가 숨기는 해결방법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인간이거나 인간적인 존재-에게는 무질서한 혼돈의 구성물이다.'

                                                             -'픽션들(민음사)'에 수록된 작품 해설 中



그의 소설에서는 '확정'적인 것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의 픽션들은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허구에서의 허구로의 탐험도 불사한다. 그는 우주의 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우주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오히려 그 질서가 쉽게 해석되고 풀린다면 보르헤스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서는 더 이상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해독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듯 하다. '바벨의 도서관'의 메뉴얼의 존재나 '불사조 교파'의 '비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복권'의 복권들이 그 예이다.



단편집이기에 내용에 대한 감상들은 내가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나 적었던 메모들로 대체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그 때가 되면 지구상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보잘 것 없는 스페인어는 사라질 것이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아드로게에 있는 이 호텔에서 조용한 매일을 보내며 토머스 브라운 경의 "납골당 매장"을 케베도식으로 엉성하게 번역 해 놓은 원고(나는 이것을 출판할 생각이 없다.)를 계속 손보고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中


아마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우선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고 (픽션들의 가장 처음이야기이다) 그의 스타일을 가장 처음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제껏 이렇게 훌륭한 끝맺음을 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시작부터 시종일관 자유롭게 독자를 기만하는 보르헤스의 뛰어난 능력에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단편집을 열기에, 충격을 선사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놀라웠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너무나 담담하다. 그는 틀뢴의 '힘'과 '진실'을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계속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지금 이 이야기 속 현실 또한 시효가 될 것이며 잠정적인 무의미가 될 것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틀뢴의 백과사전 또한 그가 우연히 거울을 보면서 알아낸 인간의 상상물이라는 것, 즉 이 이야기 자체도 '틀뢴'일지 모른다는 저자의 기만적이고 발칙한 도발일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몰입을 순식간에 환기시켜주는 정말로 멋진 마무리였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필사적으로 한 힌두교도를 죽인다.(또는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中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이라는 이야기는 저자의 '주'로 이야기를 끝맺는 형식을 취한다. 이야기의 이러저러한 애매한 유사성들은 '찾는 주체'와 '찾는 대상'간의 애매한 경계성에서 비롯된다. 또한 '찾는 주체'가 '찾는 대상'에게 이미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알모타심이 법학생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흰두교도'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라는 대목에서 그가 알모타심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저자의 주에 들어가 있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멋진 문장이다. 찾으러 밖으로 나가는(두 개의 철길을 건너는) 것과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같은 철길을 두 번 건너는) 것의 모호한 경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혼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이유는 주인공도 알 수 없었다고 소설에서 나온다.) 알모타심을 쫓았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 정작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즉 '알모타심을 찾으려는 행위'는 '알모타심'을 자꾸 '나'로 변하게 했다. 즉 그를 죽이는 행위였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찾는 행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실험적인 기법과 짧은 분량으로 '존재들의 관념적인 인식과 절대성의 모호함'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잘 담았다는 것에 대해 경의로울 정도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영관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 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 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저작들은 지금 다시 읽음으로서 재창조된다. 그 책들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늘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재탄생하는 현재(現在)성을 지닌다.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저자였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돈키호테를 '옮기려다' 포기했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신성(神聖)의 우연성]


고귀한 신의 섭리는 있을 지 없을지 모르며 그 법칙도 우리가 만들었거나 동시에 신이 만들었다. 우리는 동일한 일을 '신의 섭리'라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어느 변칙적 사건이 발생해도 '신성' 앞에서는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숨은 회사의 실재(實在)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저자의 '신성'에 대한 사르카즘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일들도 '신의 이름으로' 의연히 받아들여지는 말도 안되는 세태를 비꼰 것은 아닐까? (현재 IS의 자행들을 본다면...)


                                             A thousand years of failure

A thousand years they bled To the bear, the blitzkrieg, and the holy father They just bowed their heads

From Lyrics of 'Still Echoes' by Lamb of God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독자는 해당되는 장들을 다시 살펴보고, 진짜로 맏는 해답인 다른 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범한 책의 독자는 책의 '탐점'보다 더 명민하다.'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中


<배신과 영웅에 관한 주제>

'이성적/논리적 사고'를 맹신하는 태도에 대한 보르헤스의 반박. 재밌게도 살인의 시작인 첫번재 사건은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였고 트레비라누스가 무심하게 툭 던졌든 그 말 그대로였다.


<불사조 교파>

종교적/관습적 '믿음'(혹은 문화이거나 습관이거나 전통이거나)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거나 말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이 '믿음'은 말로 설명되기 힘든 모호성을 지닌다. 어떨 때는 좁게 어떨 때는 전지구적으로 죽지 않고 여러 세대를 걸쳐 '영원'의 존재가 된다. 마치 불사조처럼 말이다. 비밀이라는 말로 이를 재밌게 표현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말로 아주 '정확하게' 규정해서는 안되는 '비밀'인 것이다. 규정한다면 매우 웃긴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예의를 지키고(혹은 예수에게 기도하고 부처에게 절하는) 하는 무언의 '비밀'들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치들에 맞게 조목조목 다 규정이 된다면 얼마나 웃긴 일이겠는가. 우리는 '비밀'로서 이것들을 이어나간다. 불사조 교파의 교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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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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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1943)

도서 2015. 8. 12. 20:58







어린 왕자 (1943),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눈물나게 아름다운 순수함의 멜랑꼴리


슬프다. 정말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생텍쥐페리의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정말 감명깊게 읽었다. 이 책을 쓰고 1년 뒤 어린 왕자에게로 떠나버린 저자를 생각한다면 이 책의 멜랑꼴리함는 더욱 더 크게 느껴지는 듯 하다.


어린 왕자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생텍쥐페리 자신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을 겪고 망명을 해야만 했고, 비행 중에서의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그의 마음 속에서는 사람들간의, 나아가 존재들간의 진정한 관계는 무엇인가 에 대한 울부짖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어린 왕자라는 인물을 통해 찾고자 했다.


동화 치고는 밝지 않은, 암울한 분위기와 진지함 그리고 마지막의 깊은 여운과 가슴 먹먹함은 이 책의 깊이를 더해준다. 어린왕자의 지구까지의 여정은 세태를 묘하게 꼬집으면서도 어린왕자의 순수한 모습을 재밌게 보여준다. 어린 왕자의 순수함 앞에서 자신들의 바오밥나무를 뽑내는 어른들의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대해 이해성이 있어야 한다.'


-어린 왕자 中, 생 텍쥐페리



하지만 어른들은 벌써 어린 왕자의 별을 너무 작게 만들어 버렸다. 어른들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이해해버리는 것은 너무 슬픈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별을 너무나 작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작은 별을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바오밥나무(어른들)의 침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선다. 그리고 그 대신에 그는 단 하나의 희망(장미)인 '사랑'을 심는다. 불행하게도 지구에 와서야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상자를 꿰뚫어 양을 볼 줄 모른다.'


-어린 왕자 中, 생 텍쥐페리



세상에서의 많은 사람들은(나를 포함한) 뱀 속의 코끼리나 상자 속의 양을 꿰뚫어 볼 줄 모른다. 아니 모르게 된다. 주인공이 6살 때 겪은 좌절은 우리가 만들어진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반성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 슬펐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슬펐고 세상이 그렇기에 슬펐다.


이 말로 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너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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