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1946), 블라디미르 나로코프
소설에서는 그 소설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나 저자가 의도적으로 담은 저자의 사상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하나의 허구, 즉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들이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 그것들을 숨겨놓는 것이다. 이것이 논문이나 에세이에 대비되는 소설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찾아내지 않는 이상 그저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글이기도 하다. 이성으로만 가득찬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언가 이상하고 무언가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야 한다. 조르바를 읽고 썼던 글에서도 밝혔듯이 아주 특이할 것 없이 일상적이고 논리적인 필연들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사소한 잡담 속 이야기들도 우리가 이해 못 할, 예상 못 할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닌가.
블라디미르 나로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씀에 앞서 이렇게 장광설로 시작한 것은 롤리타라는 이야기가 후자 쪽임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딱히 느낀점을 길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코멘트 했듯이 나로코프는 이 소설에 그 어떠한 메시지나 사상도 담지 않았다고 한다. 롤리타에서 그저 이야기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라는 의도로 한 말인 것이다. 이 소설의 소재에 대한 맹렬한 비난를 피하기 위한 자기변호이기도 한 것 같지만서도...
그렇다면 감상은 매우 단순해진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가, 잘 쓰여졌는가에 대한 느낌만 남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천재적이다. 문체가 엄청나게 대범한데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쓰여진 그 어느 글과 비교해도 완성도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처절하다. 작가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위트있는 다양한 고전과 현대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패러디와 언어 유희로 넘치고 리얼리즘의 형식적인 요소들도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함이 돋보인다기 보다는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여유가 느껴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문학동네 판의 미주를 하나하나 맞춰보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를 도와줬다.
그런데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 손에 쥐여준 환상적인 선물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리하여 나는 저물어가는 저녁의 가랑비를 뚫고 달려갔는데, 앞유리 와이퍼가 전속력으로 움직였지만 쏟아지는 내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로틱과 로맨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반전과 안타까움, 그리고 간절하고 처절한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고 아주 깊은 여운을 준다. 단순히 험버트 험버트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스캔들로 치부하기에는 이 책의 그 이외의 요소들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이런 특이한 소재가 이 책의 여러 요소들의 시너지를 돕는다라고 생각이 들 만큼 나는 나로코프의 매력에 설득되었다.
간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여운 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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