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바리 부인 (1857)

도서 2015. 9. 1. 01:53








보바리 부인 (1857), 귀스타브 플로베르








권태와 향락 그리고 파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은 직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두 세계관의 연속성이 묘하게 두 소설을 갈라놓는다.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혁명 이후 점차 나아지는 삶의 빈곤, 이 시간적인 배경의 불연속점은 두 리얼리즘 소설들의 사상적 틀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연에 감사했다.


귀족이 아닌 평민 샤를 보바리의 자족과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프랑스 혁명 이후 굉장히 안정되고 절대적인 삶의 질이 상향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하나의 현상이다. 예전의 착취 속에선 보바리의 모친이 그의 장래를 위해 뒷바라지 하는 그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엠마 보바리의 허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녀의 허영 또한 혁명 이전 시기의 지나친 착취에 시달리던 평민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여유' 였을 것이다. 치열하게 삶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와 어느 정도 안락한 삶에서의 권태와 허영에 관한 이야기가 불과 몇 십년의 텀을 두고 개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책 'Status Anxiety'에서 말했듯이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샤를 보바리, 엠마 보바리, 그리고 용빌에 많은 주민들 같은 문학적 인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농민들이 당장 닥쳐오는 빈곤과 궁핍에 한끼한끼 걱정하며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던, 그렇기에 자크들 서로들에게는 따스했던 생탕투앙과 달리 융빌의 주민들은 가식에 숨어 서로에게 표면적으로 따스한 척하지만 사물들에 물욕을 가질 만한 여유 정도는 생겼다. 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독립적으로 사물들의 가치를 판단하고 오직 그 가치에만 현혹될 만한 삶의 여유는 생겼다.


소설에는 수많은 보바리가 나온다. 보바리 부친, 보바리 모친, 첫번째 보바리 부인, 보바리(샤를),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보바리 부인(엠마)까지.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보바리라는 이름을 통하여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샤를 보바리라는 인물을 책의 모든 사건들의 구심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다. 샤를 보바리는 소설의 극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소설의 전면에 나오는 일이 드물다. 장장 500페이지 내내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일도 적을 뿐더러 소설의 사건들에 전연 영향력이 없어 보인다. 보바리 모친에 의해, 첫번째 보바리 부인에 의해, 그리고 엠마 보바리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자족함으로 인해 오는 행복을 만끽함으로서 모든 일들에 타고난 둔감을 발휘한다. 그의 둔감한 성격과 천부적인 자족 능력은 엠마 보바리를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세상의 통념을 따르고 도덕을 지켜야지요"

                                        -소설 中


"보바리 부인 … ! 아! 모두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요 … ! 게다가 그건 당신 이름도 아니에요. 다른 남자의 이름이니까요!"

                                        -소설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엠마는 사실 허영은 엄두도 못 낼 집안의 소녀였다. 하지만 엠마로 살던 그녀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권태와 허영, 그리고 정조와 사회적 인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는 소설의 사건들과 그녀의 소비 습관 그리고 독서라는 여러 장치들을 통해 소설 곳곳에서 구체화된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런 대립의 양상과 그녀의 변화를 읽는 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정도로 저자는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하였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초중반 부 보바리 부인은 깊은 곳부터 뿌리깊게 잠식하고 있는 그녀의 권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마음 속으로는 허영과 일탈을 꿈꾸지만 언제나 그 기로에서는 자신의 정조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허영과 권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오히려 엠마가 아닌 보바리 부인으로 계속 남으려 한다. 물론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 역시 다른 간통한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 뒤의 형벌이며 대가이기도 한 비겁한 순종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中


'모든 게 거짓일 뿐! 미소 뒤에는 항상 권태의 하품이 감춰져 있고, 기쁨 뒤에는 저주가, 쾌락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으며 최상의 키스라 할지라도 더욱 큰 관능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만 입술 위에 남겨놓을 뿐이다.

        -소설 中



하지만 결국 그녀는 외부의 여러 자극과 자신의 내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허영과 권태를 마음껏 발산해 나간다. 한번 풀린 고삐는 좀 처럼 다시 채워질 수 없었다. 그녀는 사회 물정과 자신의 행동들에 복재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철부지이자 낭만주의자였다. 저자는 그녀에게, 혹은 낭만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차갑게 던진다. 아주 차갑게. 세상은 변했으며 더 이상 우리에게 낭만을 찾다가는 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낭만주의 대한 강한 일침을 가한다. 이 일침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며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착취의 고통에 의해 마취되어 있었던 그 당시 시민들의 낭만은 자꾸만 분출되어야 했다. 삶은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낭만으로의 향유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꿀 수 없다. 낭만을 꿈꾸지만 그 낭만을 위한 재물 탐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에 묶여있어야 한다. 저자가 당시 사물의 인식에 대한 변화를 얼마나 잘 꿰뚫고 있는지, 그리고 통찰은 문학 작품으로 얼마나 뛰어나게 승화시켰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놀라을 금할 수 없다.


보바리 부인.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텐션 높은 특별기획 드라마가 아닌 느린 전개속도와 끊임없는 예고들의 연속인 일일드라마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감과 몰입도가 아닌 얼마나 진짜인 것처럼 보여주느냐에 대해 저자는 집중한다 (실제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실제로 일어난 어느 부인의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과 세상의 진실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그의 아주 차가운 이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 그 이상의 깊은 여운과 무거운 당혹감을 나에게 선사했다.


보바리 부인의 파멸도 소름돋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는 보바리 부인의 파멸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없이 현실만을 직시하며 자기들의 낭만만을 채워나가려는 주변인물들을 부각시켰는데 그의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표현능력에 놀라움을 넘어 공포까지 느껴졌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가히 최고라고 할 만큼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이 당시 고발을 당할 정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생각없이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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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이긴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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