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2009), 피트 닥터
이보다 멋진 영화의 프롤로그가 있을까? 아무 대사없는 5분 남짓한 영화의 오프닝은 이 영화의 모든 내용과 모든 주인공의 행동, 감정들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이 오프닝에서부터 시작된 진한 감동과 여운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청자를 무겁게 압도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들 부부의 일생이, 그리고 그렇게 쌓여간 추억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그리고 지나간 아쉬운 것들도 후회가 아닌 추억이라는 것을 이 장면들을 통해 말해준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자신의 추억에 집착한다. 이 추억을 추억인 상태로, 그대로 보존한 채, 자신의 여생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주변의 공사에도, 그리고 러셀의 끊임없는 요청에도 마음을 닫은 채 엘리와의 추억을 그리며 살아간다. 최고의 오프닝을 통해 이 노인의 고집은 오히려 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노인의 고집을 비난하기보다는 노인의 고집에 동조하게 된다.
멋진 모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젠 새로운 당신의 모험을 떠나봐요! 사랑해요, 엘리.
이러한 노인의 고집은 그의 아내 엘리의 한마디로 바뀌게 된다. 늘 자신의 아내에게 즐거움을, 새로움을, 신선함을, 여행을 선물하여주지 못 하였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있던 노인은, 엘리의 글귀 하나로 변하게 된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에 아쉬움과 슬픔은 있었겠지만, 엘리는 그 추억들 모두가 멋진 모험이었음을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에서 그의 새로운 모험을 사랑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시간을 빙빙 돌아 노인이 된 주인공에게 드디어 닿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흘려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아쉬움을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지금은 순간이야,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사람들을 더는 기억하지 않도록.
- '일기' 가사 中. 몽니
저마다 소중한 추억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는걸까. 추억이란 무거운 짐일까 아니면 함께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삶의 날개인걸까. 주인공은 추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추억이 도착해야할 그 곳으로 가기를 집착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추억을 놓아도, 여전히 추억은 그의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애니메이션은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그리고 누군가의 못다한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랑가들에 대한 찬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꿈과 추억은 저 머나먼 무지개 드리운 폭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차분하게 말한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해주는 이들과 함께라면 꿈과 추억은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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