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그의 단편선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 1941년에 먼저 출간된 후 '기교들(Artifices)'이 1944년 '두 갈래로 갈아지는 오솔길의 정원'에 추가되는 식으로 출간이 되면서 '픽션들(Ficciones)'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리고 1956년에 '기교들' 섹션에 세 작품 '끝', '불사조 교파', '남부'가 추가되었다. (위키백과)
총 열입곱 편의 소설은 모두가 짧은 단편으로 다 합쳐봐야 200페이지를 살짝 넘는 분량이다. 당시에 성행했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분량은 아쉬운 단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짧은 분량은 그의 천재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는 누구도 생각못할 다양한 이야기와 무시무시한 구성들로 '픽션들'을 채워놓았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서문 中
그는 평생을 도서관에서 일하고 도서관에서 살았다.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는 직업 또한 책에 관한 일들을 하는 직업이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을 보았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였겠는가. 그 수많은 책들과 인류의 역사를 읽고 있자니 그는 평범하고 장황하게 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특이한 사상과 특이한 구조를 책에 담고 싶었고 그것을 담기에 장편의 분량은 너무 쓸데없이 길고 지루하며 불필요했다고 느꼇던것 같다. 그래서 그는 색다른 구조와 간결한 문장 그리고 단어들의 중의적 사용과 기가 막히는 메타포로 단편들을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로 읽어도 재밌는 편이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곱씹어 보는 행위를 통해 제대로된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책에 담은 어떤 맹아적인 생각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 단편들을 읽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웠고 놀라웠으며 황홀했다.
'이러한 우주의 혼돈은 해결방법을 아는 사람-즉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에게는 완벽한 질서이지만, 이 혼란의 미로가 숨기는 해결방법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인간이거나 인간적인 존재-에게는 무질서한 혼돈의 구성물이다.'
-'픽션들(민음사)'에 수록된 작품 해설 中
그의 소설에서는 '확정'적인 것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의 픽션들은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허구에서의 허구로의 탐험도 불사한다. 그는 우주의 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우주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오히려 그 질서가 쉽게 해석되고 풀린다면 보르헤스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서는 더 이상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해독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듯 하다. '바벨의 도서관'의 메뉴얼의 존재나 '불사조 교파'의 '비밀'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복권'의 복권들이 그 예이다.
단편집이기에 내용에 대한 감상들은 내가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나 적었던 메모들로 대체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그 때가 되면 지구상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보잘 것 없는 스페인어는 사라질 것이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아드로게에 있는 이 호텔에서 조용한 매일을 보내며 토머스 브라운 경의 "납골당 매장"을 케베도식으로 엉성하게 번역 해 놓은 원고(나는 이것을 출판할 생각이 없다.)를 계속 손보고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中
아마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우선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고 (픽션들의 가장 처음이야기이다) 그의 스타일을 가장 처음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제껏 이렇게 훌륭한 끝맺음을 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시작부터 시종일관 자유롭게 독자를 기만하는 보르헤스의 뛰어난 능력에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단편집을 열기에, 충격을 선사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놀라웠다.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너무나 담담하다. 그는 틀뢴의 '힘'과 '진실'을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계속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지금 이 이야기 속 현실 또한 시효가 될 것이며 잠정적인 무의미가 될 것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틀뢴의 백과사전 또한 그가 우연히 거울을 보면서 알아낸 인간의 상상물이라는 것, 즉 이 이야기 자체도 '틀뢴'일지 모른다는 저자의 기만적이고 발칙한 도발일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몰입을 순식간에 환기시켜주는 정말로 멋진 마무리였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필사적으로 한 힌두교도를 죽인다.(또는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中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이라는 이야기는 저자의 '주'로 이야기를 끝맺는 형식을 취한다. 이야기의 이러저러한 애매한 유사성들은 '찾는 주체'와 '찾는 대상'간의 애매한 경계성에서 비롯된다. 또한 '찾는 주체'가 '찾는 대상'에게 이미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알모타심이 법학생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흰두교도'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라는 대목에서 그가 알모타심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저자의 주에 들어가 있다.
'그는 두 개의 철길을 건넜거나, 아니면 같은 철길을 두번 건넌다.' 멋진 문장이다. 찾으러 밖으로 나가는(두 개의 철길을 건너는) 것과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같은 철길을 두 번 건너는) 것의 모호한 경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혼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이유는 주인공도 알 수 없었다고 소설에서 나온다.) 알모타심을 쫓았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 정작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즉 '알모타심을 찾으려는 행위'는 '알모타심'을 자꾸 '나'로 변하게 했다. 즉 그를 죽이는 행위였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찾는 행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실험적인 기법과 짧은 분량으로 '존재들의 관념적인 인식과 절대성의 모호함'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잘 담았다는 것에 대해 경의로울 정도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영관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 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 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저작들은 지금 다시 읽음으로서 재창조된다. 그 책들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늘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재탄생하는 현재(現在)성을 지닌다.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의 저자였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돈키호테를 '옮기려다' 포기했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신성(神聖)의 우연성]
고귀한 신의 섭리는 있을 지 없을지 모르며 그 법칙도 우리가 만들었거나 동시에 신이 만들었다. 우리는 동일한 일을 '신의 섭리'라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어느 변칙적 사건이 발생해도 '신성' 앞에서는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숨은 회사의 실재(實在)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저자의 '신성'에 대한 사르카즘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일들도 '신의 이름으로' 의연히 받아들여지는 말도 안되는 세태를 비꼰 것은 아닐까? (현재 IS의 자행들을 본다면...)
A thousand years of failure
A thousand years they bled
To the bear, the blitzkrieg, and the holy father
They just bowed their heads
From Lyrics of 'Still Echoes' by Lamb of God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독자는 해당되는 장들을 다시 살펴보고, 진짜로 맏는 해답인 다른 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범한 책의 독자는 책의 '탐점'보다 더 명민하다.'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中
<배신과 영웅에 관한 주제>
'이성적/논리적 사고'를 맹신하는 태도에 대한 보르헤스의 반박. 재밌게도 살인의 시작인 첫번재 사건은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였고 트레비라누스가 무심하게 툭 던졌든 그 말 그대로였다.
<불사조 교파>
종교적/관습적 '믿음'(혹은 문화이거나 습관이거나 전통이거나)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거나 말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이 '믿음'은 말로 설명되기 힘든 모호성을 지닌다. 어떨 때는 좁게 어떨 때는 전지구적으로 죽지 않고 여러 세대를 걸쳐 '영원'의 존재가 된다. 마치 불사조처럼 말이다. 비밀이라는 말로 이를 재밌게 표현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말로 아주 '정확하게' 규정해서는 안되는 '비밀'인 것이다. 규정한다면 매우 웃긴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예의를 지키고(혹은 예수에게 기도하고 부처에게 절하는) 하는 무언의 '비밀'들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치들에 맞게 조목조목 다 규정이 된다면 얼마나 웃긴 일이겠는가. 우리는 '비밀'로서 이것들을 이어나간다. 불사조 교파의 교도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