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0), 신영복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인범이 되었고 종신형을 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레닌, 마르크스, 모택동의 저서를 읽는 것을 넘어 학교 후배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껴쓰고 돌려 읽게 하였고 김질락의 본의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김질락과 일종의 사상적 친분관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통혁당 사건의 핵심인물과의 관계와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는 해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되어 무기징역수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총의 방아쇠만 당기지 않았을 뿐이지 그 살인사건의 모든 알리바이를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앤디 듀프레인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억울한 심정도, 재판부가 마냥 견강부회 했던 것만도 아닌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저자의 억울한 심정과 그 긴 긴 옥살이를 그가 어떻게 승화시켰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사연을 먼저 공감해야 했다. 그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의 억울함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나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20년. 조금만 보태면 내가 지금껏 살아온 나의 나이만큼 옥벽 사각상자 안에 갖혀있었던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없을 뿐더러 그 수감기간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기에 있어서도 겸허해지게 만드는 시간이다.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책 中
영석에게
내가 있는 감방의 벽에, 누군가가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나는 이 때에 찌들은 '낙서'를 네게 전하고 싶다. 흥미 있는 일과 가치 있는 일의 차이는, 곧 향락과 창조의 차이이며, 결국 소(消), 장(長)의 차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책 中
저자의 30대 그리고 40대에 걸친 인생에 대한 사색과 글들은 그가 수감생활을 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한결같은 자기 반성과 자기 계발에 대한 의지는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면 저자의 글이 뒤로 가면 갈수록 깊어지고 은은한 여운이 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20년 옥살이만 한 이에게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감옥이라는 곳이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해 많은 것이 단절되고 결핍된 곳이기 때문에 사색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이 된다. 혹자는 너무 진지한 것이 아니냐, 당연하거나 작은 일들을 너무 혼자 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감옥에서부터의' 사색 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없이 장기간 동안 무의무탁의 상태에 있을 때 나 자신이 괜히 진지해지고 사색적이 되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색은 위 혹자의 말처럼 판단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 무엇보다도 인생의 소중한 밑거름일 것이다. 그의 소중한 사색들을 읽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 사색을 통해서 새로운 사색을 해보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책 中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워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책 中
저자의 시적인 표현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통찰에서오는 깊은 공감도 느낄 수 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소중하여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와 그의 독서 풀(pool)에서 비롯되는 동양미 넘치는 글들을 읽으면서 한동안 해외고전과 번역체에 둘러싸였던 나에게 좋은 여운들을 남겨주었다. 특히 마지막 편지의 여운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20년 동안이나 혼자 날 수 없었던 새끼 참새.
아래에는 책의 <한 발 걸음>을 읽다가 적어보았던 생각을 덧붙여본다.
<직립 보행>
현대사회는 로봇의 시대이다. 인간의 노동력 그 이상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지닌 로봇은 인간이 해왔던 수많는 노동을 대체해왔다.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화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직립보행을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한다. 그 단순한 동작들 속에 중심을 잡는 우리들의 몸의 아주 복잡한 역학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인식과 실천. 이 두 다리의 직립보행은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힘든 움직임이다. 실천이라는 다리를 쓰지 못하고 외발걸음으로 천천히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나는 늘 실천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두려워한다. 아니 현실에 안주하기를 달가워하며 이러한 퇴영적 안주 속에서 자족한다. 20대 초반 수많은 실천으로의 나의 도전은 나의 서툼때문인지 나의 성격때문인지 수없이 나 자신에 의해 짖밟혔고 나는 결국 한 다리를 절게 되었다. 내가 과연 두 다리를 딛고 설 수 있을 지에 대한 불안함에 나의 용기는 사라져간다. 오히려 두 다리로 걸으려 했던 스무살의 걸음마를 포기해서 그런지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영영 한 다리를 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 겁이 난다. 기실 아파야 되는 것이거늘 나는 아플 것에 겁이나 그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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